“중요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그것뿐이지요.” 최진석 교수의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을 통해 내면의 본질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진정한 천직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뿐이며, 모든 인간은 현재의 자기 모습 이상이라는 선언은 니체의 망치처럼 영혼을 때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를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을 향해 걷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겠으나, 그보다 더 숭고한 업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모든 지적인 공부와 수련은 자기 멋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무지를 이겨내려는 겸손한 도전이다”라는 문장은 투자 심리를 관통한다. 객관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심리적 기대치를 사실로 착각하거나 합리화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시장에서 우리는 대개 자기감정 때문에 난파당한다. 파국은 언제나 대응하지 못한 감정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 배가 난파되었을 때 할 일은 하늘을 향한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살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온몸으로 발버둥 치는 대응이다. 그렇게 적응하다 보면 경험은 어느덧 미래의 생존을 담보하는 실력이 된다.
감정을 문밖에 세워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수익이다. 하지만 꼼짝달싹하지 않는 이 무거운 감정의 족쇄를 끊어내는 것, 그것이 나를 향해 내디뎌야 할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막연한 기대와 성급함을 이겨내고 유리한 타점을 기다려 잘 진입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끈질긴 희망과 탐욕을 꺾어버리고 손실을 짧게 자르며 ‘잘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제대로 배설하지 못하면 병들 듯, 투자 또한 마찬가지다. 잘 싸지 못하면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듯이, 손실을 짧게 자르며 비워내지 못하면 시장이 선사하는 새로운 기회(진입)를 맞이할 공간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손실을 짧게 자르지 못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 본성의 필연적인 저항이다. 하지만 이 감정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파산’이라는 시한폭탄을 베개 삼아 매일 밤 불편한 숙면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잘 버리는 자만이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일 때, 평온한 투자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손절은 마음 청소다. '올라오겠지'라는 희망을 붙들고 버티는 것은 마음을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이다. 손실을 던져버리는 것이 마음 청소의 시작이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외부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힘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힘을 통해 ‘초인’으로 태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인간의 삶에서 의존의 대상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투자자의 세계에서도 이 선언은 유효하다. 막연한 기대로 시장에 기도하게 만드는 인간 본성이 창조해 낸 가상의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뇌동매매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투자의 서막을 열게 된다.
투자자는 투자라는 도구를 통해 군중이 탐닉하는 안락한 길을 거부하고 고독하게 ‘힘에의 의지’를 세워야 한다. 태생적 한계이자 나쁜 습관인 인간 본성을 자기 성찰이라는 망치로 하나씩 깨뜨려 나가야 한한다. 시장에 요행을 바라거나 보이지 않는 손에 운명을 맡기지 않고, 오직 스스로 세운 원칙과 해석 체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그것이 니체가 말한 주체적인 삶이자 성공한 투자자의 생존 방식이다.
시장에서 기도하는 제단의 제물은 자기 돈이다. 본능의 우상을 파괴한 자는 시장의 주인이 되어 찬란한 우상향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기도가 시작되는 곳에서 투자는 끝이 나고, 원칙이 시작되는 곳에서 초인이 태어난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기대수익률과 위험은 정비례한다. 부자의 게임은 큰 자본으로 낮은 목표수익률을 설정하여 복리의 안정성을 추구한다. 목표수익률이 낮기에 안전하며, 낮은 요율이라 해도 원금이 크기에 그 절대 금액은 가난한 자의 무모한 도전을 압도한다. 반면 가난한 자의 게임은 적은 돈으로 단방에 큰 수익을 노리는 도박의 방식을 취한다. 수익보다 위험이 비대하게 커지는 이 방식은 거듭될수록 투자자를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부동산이 비교적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성이 부자의 게임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며, 많은 이들이 주식시장에서 실패하는 것은 그것을 가난한 자의 단판 승부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수익은 실력이 향상되는 속도에 맞춰 조금씩 불어나야 한다. 자본이 적을수록 더욱더 시간에 의지해야 한다. 버티는 시간과 쌓이는 실력은 정비례하며, 처음은 더디고 미미해 보일지라도 원칙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성취에는 거쳐야 할 단계가 있고, 그 단계란 곧 시간의 투자임을 이해해야 한다.
단계를 거치면서 단단해진다.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결승선에 닿으려는 조급함의 유혹을 뿌리치고, 실력을 쌓아갈 때 적은 돈은 부자의 자본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인생이 희극보다 비극에 기우는 까닭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와 환경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에 기인한다. 나무가 아무리 곧게 자라려 해도 넝쿨 식물이 몸을 감싸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지금의 나’가 세운 굳건한 원칙도 ‘나중의 나’가 품는 막연한 기대와 탐욕에 엉키고 마는 사람의 마음은 요물이다. 시장은 그저 좋고 나쁨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파동 또한 유리함과 불리함을 오갈 뿐이다. 이 무심한 순환 속에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명확하다.
첫째는 성급함과 탐욕이 마음의 무게추를 기울이기 전에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 둘째는 헛된 희망에 달뜨거나 핏빛으로 물들기 전에 Red Zone에서 빠르게 실패를 확정 짓는 것. 셋째는 사람은 변하지 않기에 생에서 단 한 가지, ‘첫 번째 도미노’를 제대로 쓰러뜨려 선순환의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온 정성을 쏟아 그 순리를 몸에 새길 수 있다면 남은 생은 얼마나 값지고 보람차겠는가!
변하지 않는 본성이 아니라 원칙에 길을 물어야 한다. 본성의 넝쿨에 휘감기면서도 기어이 하늘을 향해 원칙의 가지를 뻗는 것, 그것이 투자자가 마주해야 할 숙명이다.
선한 일을 해도 ‘조리’의 정점에 있는 신은 그들을 살리지 않는다. 이렇듯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뚜렷이 보려고 애쓸 뿐이다.” 애써 살피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성실성”으로 쉼 없이 투쟁한다. 삶의 요점은 부조리한 내가 부조리한 세계와 투쟁해서 어떻게 자기만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복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입니다.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투자의 요점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비합리적인 내가, 비합리적이면서도 비열한 시장과 투쟁하면서 과연 지속가능성의 고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투쟁이란 거친 파동 속에서 나를 지키며 성장하겠다는 의지다. 시장은 심리적으로 성숙해지며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야 할 대상이다. 이익을 길게 가져가는 법을 깨우치기 전까지, 돈이 되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투자의 필연적 과정이다. 추세의 끝까지 몸을 싣기 위해서는, 수없이 손실을 짧게 쳐내며 버텼던 경험이 밑거름되어야 한다.
손절은 시장이 요구하는 첫 번째 자격이다. 결국 손실을 짧게 끊는 행위가 마치 숨을 쉬듯 당연한 감정이 되기 전에는, 결코 시장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결론에 또다시 도달할 것이다.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양심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인격이나 문명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요. 원초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는 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대한 관찰과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지 없이 순박함만 있는 상태, 그것을 걸리버는 무지로 보는 것이지요."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시장이 내 선량함과 간절함에 응답해 주리라 믿는 것은 무지이며, 이 감상적 태도를 버리고 시장의 실상을 직시하는 건너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기회와 보상이 당장 오지 않는다 해서 분노할 필요는 없다. 원칙을 사수하는 노력과 용기는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고 하기 싫은 일은 없으나, 그 경계를 건너가는 자만이 비로소 진짜 인간의 궤도에 진입한다. 진정한 천직이란 평생을 걸쳐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 길뿐이다. 세계를 내 뜻대로 해석하고 장악하려는 ‘소유적 태도’를 과감히 벗어던져라. 대신, 정해진 마음 없이 맑은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는 ‘존재적 태도’로 “이 세계는 변하며, 우리는 머지않아 죽는다”라는 준엄한 문장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모든 지적인 수련은 내 멋대로 해석하는 무지를 깨부수는 겸손한 도전이다. 투자는 죽음과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존재의 기술이다.
투자라는 행위 속에서 원칙의 문제를 오랜 세월 다루며 깨달은 것은,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 확률인가 하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에 베팅하는 것이 옳음을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래의 나를 믿었던, 혹은 미래의 변화를 확신했던 그 터무니없는 오만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마음으로 공감하기까지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아침 일찍 달리겠다는 사소한 결심조차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투자의 원칙을 다루는 일이 쉽겠는가. 작심삼일로 흩어진 숱한 맹세를 떠올려 보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게 된다.
김상용 시인이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던 그 허탈한 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어렵고도 고독한 신독(愼獨)에 앞서, 조금이라도 말을 삼키는 신언(愼言)을 실천하려 한다. 뇌가 쏘아 올린 섣부른 다짐을 혀끝에서 삼키는 것, 자신이나 타인에게 행하지 못할 말을 거두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생각을 삼킬 때 원칙의 목소리는 들리기 시작한다. 투자는 결국 ‘숱한 맹세와 인간 본성의 기본값으로 되돌아가려는 영원회귀’ 사이의 투쟁이다. 그 투쟁의 과정에서 성숙해지는 자기 성찰이야말로 투자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고귀한 수행의 열매다.
“행복은 고만고만하고 불행은 제각각이다”라는 톨스토이의 통찰이 화살이 되어 심연에 박혔다. 원칙 준수, 낮은 레버리지, 인내하는 기다림, 그리고 짧은 손절—이 네 가지는 투자라는 집을 떠받치는 네 개의 견고한 대들보와 같다. 시장에서 불행에 빠지는 길은 수만 가지 화려한 이유로 가득하지만,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이 네 기둥을 묵묵히 지켜내는 지루하고도 고만고만한 과정뿐이다. 이 중 단 하나의 기둥이라도 균열이 생기면 집 전체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투자자는 제각각의 비참한 사연을 품은 채 불행의 늪으로 추락하게 된다. 오직 네 기둥이 모두 온전할 때만, ‘누적 수익’이라는 평온하고도 고만고만한 행복을 허락받는다.
오랜 세월 인간의 본성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을 허물기 위해 망치질을 해왔으나, 도달한 결론은 명확하다. 투자에서 사람의 변화는 물리적으로 조금 나아질 뿐, 화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든 본성의 기본값으로 회귀하고 마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에 베팅하며 사는 것이 인생과 투자 모두에서 합리적이다. 성급함, 욕심, 자만심은 치유되는 병이 아니라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불치병이다. 암 환자가 암세포와 동행하며 삶의 가치를 찾듯, 치유되지 않는 본성과 동행해야 함을 인정한다.
본성은 알아차리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근본은 바뀌지 않기에, 늘 깨어 있는 감각으로 내면을 감시하며 살아야 한다. 이 비극적인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남은 삶에는 헛된 기대를 걷어낸 자리에 작지만 소중한 가치가 더해질 것이다.
“철학과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감정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감정을, 심리를 극복함으로써 현실을 정확히 보는 것이지요. 과학의 과는 잘게 쪼개서 본다는 뜻입니다. 주관적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세계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한편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사유합니다. (중략) 철학은 믿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간을 생각하는 주체로 해방합니다. 믿음에 갇히면 쉽게 감각과 감정에 빠지고 심리적 기대에 의존합니다. 철학은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심리적 기대보다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사유에 의존하지요.”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투자자에게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인 체계적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오롯이 주관적 감정과 객관적 사실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함이다. 이것은 주관이 주관하던 감정의 자리에 조금씩 ‘객관’이라는 이성을 채워 넣는 과정이다. 시장에는 공짜 점심도 비밀도 없으며, 자꾸만 엉키기만 하는 실타래를 푸는 열쇠는 결국 각자의 심리 안에 있다. 누가 뭐래도 투자는 심리 게임이며, 투자자 최대의 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며 시장의 큰 흐름에 익숙해질수록, 심리적 기대에 의존하던 도박적 사고를 버리고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확률적 사고로 나아갈 수 있다. 객관적으로 사유하는 주체로서 시장에 반응할 때 맹목적인 믿음의 감옥에서 해방된다.
감정에 대한 믿음이 끝나는 곳에서 투자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꼭 오를 것'이라는 심리적 기대에 갇혀, 시장이 보여주는 객관적인 신호를 외면하고 데서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과학자의 눈으로 파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철학자의 머리로 본능을 다스리면 진정한 투자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