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으며, 인간의 본성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이중성이야말로 수많은 투자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임을 새삼 깨달았다. ‘원칙을 지켰다가 어겼다가’, ‘한동안 잘하다가 엉망이 되었다가’를 반복하는 감정의 기복을 극복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투자의 과정은 곧 ‘세운 올바름’을 사수하려는 내 안의 지킬 박사와, 감정의 뒤로 숨어 본능의 자유를 탐닉하려는 내 안의 하이드가 벌이는 끝없는 투쟁이었다.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의 저자 말처럼, 돈을 버는 첫 단계는 도마뱀의 뇌가 감정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하지만 도마뱀의 뇌는 완전히 멈출 수 없기에, 그저 ‘잡아둘’ 뿐이었다.
이제 믿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을 모두 갖추었으며, 내 영혼의 어두운 본성인 ‘하이드’ 또한 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이드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둔 감옥 문을 흔들다 튀어나온 죄수와 같다. 첫 맹세의 날카로운 결심이 무디어질 때, 양심의 가책이 공포의 기억과 함께 희미해질 때, 내 안의 하이드는 다시금 변신의 약을 마시고 자유로운 욕망을 즐기라며 유혹한다. 투자는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이 하이드의 기습을 막아내며 내면의 성장을 일구는 도구다.
지킬이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은 자신이다. 도마뱀의 뇌를 억제하고 하이드를 감옥에 가둘 수 있을 때, 비열한 시장에서 이익이라는 열매를 맺을 자격을 얻는다. 이것이 자신과 주고받는 투자 세계의 셈법이다.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 선택이 계좌를 결정한다.
시장은 오롯이 확률로만 존재할 뿐, 정답을 가르쳐주는 법칙 따위는 없다. 확정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들수록 어리석음에 가까워질 뿐이다. “오를까요, 내릴까요?”라는 질문은 동전을 던져 앞뒷면을 맞추겠다는 시도와 다를 바 없는 우문(愚問) 중의 우문이다. 던져야 할 유일하고도 현명한 질문은 이것이다. “올라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너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즉, 시장의 변화무쌍한 흐름에 어떻게 맞추어 갈 것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매매 횟수가 잦아질수록 감정의 마지노선을 넘나들며 스스로 혼란의 늪에 갇히게 되기에, 매매는 적어야 함이 마땅하다.
확률의 세계에서는 불운은 예고 없이 갑자기 닥치곤 한다. 레버리지를 낮추고, 추격을 멈추고, 손실을 짧게 자르는 세 가지 생존 전략 중 으뜸은 단연 ‘손실을 짧게 자르는 것’이다. 다음 수를 기약하며 빠르게 자르거나 적절히 챙기는 것이 옳다는 깨달음은 오랜 세월 숱한 파동을 그리며 얻어낸 고통의 산물이다. 결과는 시장의 영역일지니, 그저 매 순간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결과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투자자에게 허락된 큰 축복이자 평온이다.
예측은 오만이지만, 대응은 시장에 대한 지극한 겸손이다. 시장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길 기도하는 대신,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든 살아남을 나만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만이 예측의 영역이다.
인간의 결과에서 기대치를 뺀 만큼 행복해진다. 여기서 기대치란 욕심의 발현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성급함을 낳기 마련이다. 오늘의 평범한 일상에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의 크기가 곧 기대치다. 죽음이라는 결말을 향해 나이가 들수록 더 빠르게 달려가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이 삶의 끝을 겸허히 통찰하며 기대치를 낮추고, 그 낮아진 틈 사이로 행복을 조금씩 더해갈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지겠는가. 성급함과 욕심은 인간의 태생적 한계이며, 삶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누구나 반드시 넘어야 할 자기 극복의 대상이다.
투자에서 원칙을 저버리는 까닭은 돈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며, 손실을 자르지 못하는 것은 멀리 뛰기 위해 도움닫기가 필요하다는 자연의 순리조차 기대치에 가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대치에 눈이 멀면 걸음은 뒤뚱거리고 마음은 조급함에 잠식된다. 돈과 심리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이 시장에서, 기대치를 낮추고 천천히 길게 보려는 마음가짐 없이는 결코 우상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없다. 전두엽의 차가운 이성으로 바라볼 때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던가.
비대한 기대치는 평온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욕심의 무게를 줄이는 자만이 비로소 수익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비워야 채워지고, 낮춰야 높아지는 것이 시장과 삶의 영원한 불변의 법칙이다
“성공한 투자자들은 모두 똑같이 자기 파괴적인 투자 결정을 피하지만 실패한 투자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낭패를 본다.”
<테리 버넘,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
이 통찰은 성공이란 화려한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이끄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지혜에 있음을 말해 준다. 시장에서는 언제든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반복된다. 따라서 어떠한 극단적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실수의 여지’를 언제나 크게 열어 두어야 한다.
실수의 공간을 좁고 빽빽하게 설계할수록, 그 결정은 자만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결말로 치달을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레버리지를 낮추고 진입의 마디를 여유 있게 잡는 것은 시장 앞에 겸손하게 실수의 퇴로를 확보했다는 가장 명확한 실천적 증거다. 이 증거들이 매일의 매매에서 명확하게 증명될수록, 당신은 “시장은 결국 기다리는 자를 돕는다”라는 오래된 진리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이는 곧 성공을 위해 필연적 시간의 가치를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실수의 여지는 여유로움과 결이 같이 한다. 터무니없는 확신이 실수의 여지를 잠식할수록 실수할 위험은 커진다. 시장은 틀려도 파산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다.
“포커에서 이기기 위한 핵심은 패를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즉, 좋은 패를 쥐고도 더 베팅하지 않고 그만둬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훌륭한 선수들은 종종 꽤 괜찮은 패를 쥐고도 패를 덮는다. 나중에 있을 더 큰 기회를 잡기 위해 차라리 지금 몇 달러를 잃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테리 버넘,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
상방이 유리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면서도 이미 하방에 물려있다는 이유로 그 진실을 외면하는 것, 그리고 ‘이번만은’, ‘다음에는’이라며 막연한 기대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서글픈 단면이다. 매 순간 확률적 우위에 기대어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눈 딱 감고 손실을 잘라버리는 결단만이 지속성을 담보한다. 한두 번 어렵게 잘라내다 보면 ‘행함’을 통해 습관이 변해가기 마련이지만, 그 경지에 이르는 내공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길러질 수 있다.
아닐 때 미련 없이 패를 던지고 다음 수를 기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시장에는 위아래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는 모호한 파동이 허다하다. 하지 않고 보내야만 하는 자리가 많거늘, 조금만 성급해도 우리는 어중간한 자리에서 ‘기도하는 나’와 ‘흔들리는 나’를 너무나 쉽게 마주하게 된다. 특히 고점이나 저점 부근은 흐름으로는 진행 방향일지라도, 에너지의 수렴과 발산이라는 원리 안에서는 반대 방향의 힘이 팽팽히 맞서는 구간이다. 이처럼 상·하방의 확률이 비슷한 곳에서는 관망하며 패를 덮는 지혜가 필요하다.
투자는 좋은 패보다 '덮어야 할 패'를 먼저 가려내는 결단의 게임이다. 패를 덮는 순간,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훌륭함’은 이길 때보다 질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프로야구 홍 감독은 "간절함과 조급함이 조그마한 차이일 수 있다"라면서 "작년 가을 같은 경우엔 2군에 내려가지 않기 위해 간절함을 가지고 절실한 플레이를 했다면 올해는 캠프 때부터 주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조급함이 보였다"라고 했다. 조급함에 눈이 멀면 평소라면 골라냈을 나쁜 공에 방망이가 나가게 되고, 안 좋은 플레이가 반복되면서 스스로 쫓기는 악순환에 빠진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대범함과 무모함의 차이가 미세하듯, 간절함이 조급함으로 변질되는 것도 짧은 순간이다.
자신을 증명하려고 너무 애쓰다 보면 마음은 성급해지고, 그 성급함은 어김없이 원칙을 무너뜨리는 부정적인 상태로 몰아넣는다. 고수가 되려 하기보다 오늘 주어진 공에만 집중하는 현재가 계좌를 담보한다. 스포츠든 투자든,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과한 의욕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자신의 리듬을 지킬 때 나쁜 공을 걸러낼 수 있는 혜안이 열린다.
성급함을 걷어낸 마음이 수익이라는 결과보다 먼저다. 성급함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곧 주전의 자리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실력이다. 당신의 배트는 탐욕이 아닌 절제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절대 쉽지 않다’라는 경고를 너무나도 안일하게 받아들였다. 무지는 자만과 오만이 빚어낸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절대 쉽지 않다’라는 말을 ‘하다 보면 성공할 수도 있다’라는 은근한 가능성(May)으로 해석하며 미래를 너무나 쉽게 담보 잡혔다. 그러나 시장의 본질은 ‘아무리 해도 절대 성공할 수 없다’라는 단호한 부정(Never)의 무게에 훨씬 더 무게 중심을 두어야 했다. 선인들이 남긴 선례에 조금 더 귀를 열었더라면, 막연한 기대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낭비했던 시간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성공이 대단히 어렵다는 냉철한 현실을 이해했더라면, 최소한 유비무환의 자세로 시장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실패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 안의 ‘변하지 않는 본성’에서 찾으며 똑같은 실패의 쳇바퀴를 돌지 않기로 다짐한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했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이란 허들이 워낙 높아서 다시 걸려 넘어진 것뿐이다. 그 확률이 극히 낮음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출발선에 서서 저 높은 허들을 향해 다시금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그 치열한 도전 자체에서 투자자로서의 보람을 찾고자 한다.
'할 수 있다'라는 막연한 희망은 자신을 얕잡아보는 오만과 같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May의 유혹에 빠져 대비 없이 허들을 향해 돌진하기에는 성공의 문턱이 절대적으로 높다. 실패의 원인은 변하지 않는 본성에 있으며, 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유비무환의 원칙이 세워진다.
시장은 가야 할 자리에서 가지 못하면 반대로 갈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며, 무수한 파동으로 투자자를 흔들어 댄다. 투자를 ‘기다림의 미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쉬운 파동보다 애매하고 어려운 파동이 허다하며, 수익을 주는 자리보다 심리가 지배당하는 자리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인간의 머리란 고작 ‘1원짜리 동전’에 불과하다. 그 얄팍한 머리로 시장을 이해하려 들거나, 세 치 혀로 온갖 이유를 대며 매매를 합리화하려 드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투자자라면 말로 내뱉기 전에 기계적으로 치고 빠지는 심리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이는 육체를 강화하는 근력 운동과도 같다. 시각적으로 보이거나 머리로 계산하는 것보다 실제 수익을 낼 수 있는 자리는 훨씬 적다는 것이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낸 합리적 추론이다. 이미 뇌가 쏘아 올린 섣부른 생각을 혀끝에서 삼킬 줄 모르는 자가, 어찌 시장의 그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고 날카롭게 치고 빠질 수 있겠는가.
생각이 많아질수록 손가락은 무거워진다. 시장에서 마주하는 가장 가공할 적은 언제나 내 안의 ‘말 많은 자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침묵 속에 마음 근육을 키워야만 본능의 합리화를 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도 자신을 모른다’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어제의 괴로움에도 내일을 기약하는 헛된 희망과 다짐은 투자의 실타래를 더욱 엉망으로 꼬이게 할 뿐이다. 투자자는 세상의 흐름도, 자기 자신의 반응도 예측해서는 안 된다. 투자자의 진정한 적은 확률적 세계에서 도박적으로 사고하는 자기 자신이며, 시장 방향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피지기다. 이 두 가지를 명확히 안다면 백전불태라, 비로소 시장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틸 단단한 힘이 생겨난다.
시장 방향을 지속해서 정확히 맞히는 이가 없듯,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사람 또한 드물다. 그 어떤 화려한 기법으로도 미래를 알 수 없음을, 그래서 예측할수록 어리석음의 깊이만 깊어질 뿐임을 내면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 냉혹한 진실 앞에 서면 결국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알게 된다. 아무리 해도 알 수 없으니 이 길을 떠나거나, 아니면 태생적인 나쁜 습관을 고쳐가며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장에 남기로 선택한 자에게 ‘투자는 심리 게임이다’라는 명제는 선명한 낙인이 되어 가슴에 박히고, 그는 비로소 한 단계 높은 투자자로 성장하게 된다.
예측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대응의 여지는 좁아진다. 투자는 시장 방향과 자기 자신의 반응 모두를 예측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잡초가 가득한 정원과 같다는 격언처럼, 지키지 못한 다짐과 결심은 마음의 정원에 무성한 잡초가 되어 우리를 뒤덮는다. 투자에서 생각은 말과도 같다. 행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현명함이니, 마음에 잡초가 가득해서야 어찌 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같은 ‘원칙의 나무’가 우뚝 설 수 있겠는가.
시장이란 길을 오래도록 걷기 위해서는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는 이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장의 요구조건과는 거리가 먼 유전적 결함을 지닌 듯하다. 행복을 방해하는 이기심과 그에 따른 높은 기대치, 기다림의 미학을 파괴하는 성급함과 욕심은 투자자가 마주한 태생적 한계다. 그러므로 투자의 세계에서 원칙을 지키며 시장과 함께 호흡하겠다는 의지는,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를 넘어 인간의 본능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위대한 도전이다.
생각을 줄이는 것이 곧 원칙의 뿌리를 깊숙이 내리는 일이다. 내면의 잡초를 솎아내고 본성을 거슬러 원칙의 나무를 키워내야만 시장이 허락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침묵 속에서 행하는 자만이 숲의 주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