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라."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처럼 아름답고, 동시에 이처럼 어려운 명령이 또 있을까요? 특히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내 마음과 자존심 전부를 걸어야 하는 지난한 싸움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최근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특정인의 이름표가 붙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가요?
신약성경의 가장 짧은 서신 중 하나인 '빌레몬서'는 바로 그 싸움, '용서'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급진적인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법으로 도망친 노예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변화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놀라운 부탁을 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빌레몬서 1장 16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를 '잘못을 더 이상 묻지 않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수준을 넘어섭니다. 오네시모에게 붙어 있던 '도망친 노예', '나에게 해를 끼친 자'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내고, 그를 '형제'로 새롭게 정의(定義)하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본질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덮어주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는 적극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했다"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 사람은 과거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두곤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 꼬리표를 떼어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관계의 재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용서는 미완성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빌레몬이 속한 교회 공동체 앞에서 읽히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용서가 개인 간의 화해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신앙 고백이 됨을 보여줍니다. 만약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불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사랑이라는 거룩한 부르심에 실패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이기려는 모습이 마치 법정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가정과 교회는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고 용서와 화해로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의 용서는 나만의 결단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영적 성숙도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네시모가 입힌 경제적 손실을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행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빌레몬서 1장 18절)
현대 사회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희생 없는 진정한 화해는 없다"**고 말입니다.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빌레몬 스스로 기꺼이 용서를 선택하도록 간곡히 부탁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화해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마음에서 비롯될 때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미국 아미쉬 마을의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어린아이 5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희생자 가족과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범인의 장례식에 찾아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인 범인의 가족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라는 세상의 질문에 아미쉬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우리 삶 속에서 먼저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내 삶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도 크든 작든 '오네시모'와 같은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마주하기 불편하고,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아린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오늘,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누구와 화해해야 할까요? 내 마음속에 붙여둔 용서의 꼬리표는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정의 판사가 되기보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관계를 회복하는 '형제'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용서라는 이 어렵고도 아름다운 싸움 앞에서,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