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함이 생존이 될 때, 영혼의 노래는 멈춘다

인생의 정거장, 시글락의 시간

by 박혜원

비겁함이 생존이 될 때, 영혼의 노래는 멈춘다


인생의 정거장, ‘시글락’에서 보내는 16개월


인생을 살다 보면 도저히 용기나 정의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평생을 당당하게 살고 싶었지만, 생존이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적당히 비겁해지는 순간 말입니다.


오래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시기 질투에 눈먼 권력자에게 쫓겨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늘 씩씩했을 것 같은 그도 결국 지치고 말았습니다. 끈질긴 추격 앞에 그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합니다. 적진의 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살기 위해 택한 ‘망명’이자, 어제의 적에게 머리를 숙인 ‘안락한 비겁함’이었습니다.


몸은 편안한데, 왜 시(詩)를 쓰지 못했을까?


그는 적국 왕의 배려로 ‘시글락’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합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흙바닥이 아닌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일상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도망치느라 고생했던 가족들도 이제야 한숨을 돌립니다.


그런데 묘한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광야의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주옥같은 시를 쏟아냈던 이 남자가, 시글락에서 머문 16개월 동안은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육신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졌는데, 정작 그의 영혼은 침묵해 버린 것입니다. 적의 신뢰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을 이어가야 했던 그 16개월. 시글락은 그에게 **‘안전한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시글락’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념에는 어긋나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유지하는 관계들


도덕적으로는 찜찜하지만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눈감아주는 상황들


가슴 뛰는 꿈은 사라졌지만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 안주하게 되는 어떤 환경들



우리는 그곳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안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느낍니다. 내 영혼의 노래가 멈췄다는 사실을 말이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일상이지만, 거울 속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때로 인생은 살아남기 위해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계절을 지나기도 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비겁함의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정거장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시글락의 생활이 끝나갈 무렵, 그는 결국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야만 하는 최악의 선택지에 직면합니다. 살기 위해 택한 정착지가 도리어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삶의 배려가 작동하며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얻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때로 ‘시글락’이라는 정거장을 허락합니다. 너무 지친 우리에게 잠시 숨을 고르라고, 비겁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종착역이 아닙니다.


지금 혹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시글락’에 머물고 계신가요? 몸은 편한데 영혼이 위축되는 기분을 느끼고 계신가요?


괜찮습니다. 다만 잊지는 마십시오. 지금의 안락함은 잠시 거쳐 가는 정거장일 뿐이라는 것을요. 삶의 섭리는 우리가 가장 비겁하고 연약한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나다운 삶’으로 돌아갈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노래는 시글락의 담장을 넘어, 다시 광야로 나설 때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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