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아, 문제는 맛이 아니야!

물류는 상품이 아니라, 경험을 파는 것이더라

by 여강

소싯적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오래전 당시는 배달원이 식당에 전속돼 일했다. 그 식당에서 만든 음식만 날라야 했기에, 무슨 음식을 파는 식당인지가 업무 강도를 갈랐다. 중국집은 배달 난이도가 높아서 월급이 제일 셌다. 짜장면은 곧 불기 때문에 중국집 오토바이는 빨리 달려야 했다. 서두르다 다치는 걸 자주 봤다. 다시 찾아올 그릇을 잃어버리면 혼나거나 월급에서 제했다. 더 벌려다가 다치고 월급 깎이느니, 중국집은 애초에 도전하지 않았다.


치킨과 피자가 만만했다. 적당히 식어도 크게 컴플레인이 없다. 그래도 출발하고 30분 안쪽으로는 갖다줘야 했기에, 일이 몰리면 마음이 급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족발은 사실상 식어도 먹을 만한 유일한 배달음식이다. 빨리 달려야 하는 부담이 덜했다. 손님의 배고픔을 달래지 못해 불평을 들을지언정, 음식이 왜 식었냐는 불만은 적었다. 대신 배달 거리가 늘어나곤 했다. 족발집 사장은 장사가 안 되는 날이면 멀리서 오는 주문 전화도 받았다. 한번은 족발 하나 배달하려고 편도 1시간을 달렸다. 아무리 족발이지만 팔고도 욕먹을 짓이었고, 실제로 욕을 먹었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


무엇을 배달하는지보다 중요한 건 어디로 배달하는지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배달을 떠나기 전에 지도를 보고 길을 외웠다. 복잡하면 종이에 지도를 베껴서 갔다. 지금은 도로명 주소가 잘 돼 있어서 1길 옆에 2길이 나오지만, 그때 쓰던 지번은 1번지 옆에 100번지가 오기도 했다. 한번은 대충 때려맞히려다가 길을 잃었다. 그 만만하던 치킨과 피자가 식어갔다. 하릴없이 근처 식당을 열고 들어가서 길을 물었다. 그 식당 주인은 지도를 내어주었다. 그집도 언제든 길을 잃을 수 있었기에 동업자 의식으로 맞은 거 같다.


아파트 주문이 제일 반가웠다. 주택처럼 복잡하게 길이 꼬일 것 없고 멀리서도 보이니까 직관적으로 찾아가면 된다. 한 단지에서 여러 건 배달이 들어오면 더욱 그렇다. 주택은 이집 갔다가 옆집을 가야 하는데, 아파트는 이집 갔다가 윗집이나 아랫집(동간 이동은 필요)을 가면 된다. 이때 알았다. 물건은 수평보다 수직으로 옮기는 게 편하다. 위치정보기술과 스마트폰이 대중화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파트가 주택보다 훨씬 쉽다.


언제 배달을 하는지도 관건이다. 평일은 저녁부터, 주말은 점심부터 주문이 밀린다. 퇴근길과 놀러가는 길로 교통량이 늘어나는 때라서 배달도 시간이 걸린다. 짜장면 안 불리는 걸로 유명한 중국집 배달원이라고 해도 배길 재간이 없다. 이럴 땐 어떤 중국집은 주문을 가려받는다. 짜장면 한 그릇은 정중히 사양하는 식이다. 다같이 배고픈 시간에는 주문하는 쪽이든, 가져다주는 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기다림을 피하든지, 기다림을 늘리든지. 기다림은 시간이고, 시간은 돈이다. 돈이 걸린 문제다. 짜장면 한 그릇도 돈이 아니던가.


이런 터에 주문받는 입장에서 보면 배달은 결과가 늘 동일해야 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어디든, 언제든, 어떻게든 상관없이 주문한 이를 만족시키거나 적어도 불만족을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배달원에 따라, 파는 음식에 따라, 사는 위치에 따라, 배고픈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고객 만족도가 들쑥날쑥하면 단골을 삼기 어렵다. 아무리 배달이 옆집 주문을 당겨오는 산업이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단골을 깔고 가지 못하면 매출이 지속적으로 나오기 쉽지 않았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옛말같긴 하다.)


자연히 식당 주인은 음식이 아니라 배달원에 집착한다. 결국 배달의 본질은 음식의 맛이 아니라 배달 환경의 통제다. 경험해보니 그렇다. 그때 나는 환경을 통제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부질없었다. 나(누구)조차도 하나의 변수이였다. 변수가 변수를 통제하려고 했다니, 돌이켜보면 웃음이 난다. <뒤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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