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난청자 - 은행에서 얻은 직업병

한량처럼 살렵니다.

by 작연


한 지점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최대 2년이다. 최대 기간이기 때문에 인사이동은 3개월 만에, 때론 6개월 만에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나의 경우엔 정말 드물게 한 지점에 2년을 꽉 채우고 움직이는 지박령 같은 존재였다. 지박령은 함께한 직원들을 다른 지점으로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움직인다. 6년이란 시간 동안 총 3개의 지점을 번갈아 돌아다녔다. 지점의 특성을 말하자면 위치한 동네에 따라 데시벨이 달라진다. 데시벨 30, 70, 120. 근무하는 지점이 바뀌면 구간마다 데시벨 지점도 달라졌다.



데시벨 120 지점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 고객이 많았다. 아무리 크게 말해도 어머님, 아버님을 이해시켜드리기엔 모자랐다.
“어! 머! 니! 여기! 작성! 해주세요! 이름!! 이!!! 름!!!!”


sticker sticker


모두 다 그들이 내지를 수 있는 최대 목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 소리를 지르는 통에 마치 싸움터 같았다. 영업시간이 끝나면 천둥번개가 휩쓸고 지나간 후처럼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목이 터져라 이야기할 때는 모른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온몸의 기운이 다 빠졌음을 알아채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가장 정이 많았다. 남아있는 직원들의 근무기간보다 오랜 기간을 오가신 분들, 회사의 과거까지 아는 분들, 그저 젊어서 연신 자리에 앉자마자 이쁘다고 해주시는 어머님, 매번 오실 때마다 나를 찾아 물 건너온 초콜릿이라며 손에 쥐여주시는 아버님. 정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간들. 그만큼 떠날 땐 시원했지만 이미 정들어 버린 마음은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섭섭해졌다. 점심밥을 먹고 오니 당장 내일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데시벨 30 지점으로 옮겨져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온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묵직하게 남아버렸다.



30 지점은 가장 한가했다. 120 지점을 견딘 고된 몸은 휴양지로 떠나는 마음이었다. 휴양지라 칭했지만 한가한 만큼 고객 유치에 열을 올려야 했다. 매일 홍보 안을 떠올리고 홍보물을 만드는 일이 몫으로 주어졌고 채워지지 않는 실적을 메꾸기 위해 영양가 없이 머리를 써야만 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말이 많지 않다. 근황의 물음이나 소소한 인사말조차 생략했다. 열 마디를 하면 어색한 짧은 한 마디가 돌아왔다.
“네.”
그들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길 원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처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들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속삭였다. 몸은 편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편하지 않은 곳. 휴양지가 아니라 유배지라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을 때쯤 인사발령 공문이 내려왔다. 꽉 채운 2년이 지겨워 머리는 빨리 다른 지점으로 가고 싶다 말했지만, 몸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하는 지점이 아니었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데시벨 70 지점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었다. 어느 지점보다 다양한 사람이 왔다. 평균 70 데시벨. 데시벨이 120과 0의 어느 사이를 왔다 갔다 넘나들었다. 상황과 앞에 앉은 사람에 알맞게 맞춰 데시벨을 수시로 바꿨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했다. 자식 이야기, 러브스토리, 여행 이야기 등. 얼마나 즐거운지 박수를 치고 꺄르륵 웃으며 100 데시벨이 넘어갔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나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알맞은 서류가 구비되지 않으면 일처리를 할 수 없다. 서류가 없다면 금융소비자보호법, 개인정보보호법등 그들을 보호한다는 여러 가지 법에 의해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민원인을 소리치지 않고 차분하게 처리한곤 한다. 그게 나의 응대 방식이었고 마지막은 웃으며 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몫이었다. 가끔 생각했다. 침묵이 가장 높은 데시벨을 가지지 않았을까. 마음속에서는 전쟁을 나가기 위해 전투기를 이륙시키지만 겉으론 드러내지 않는 침묵. 침묵으로 나의 가장 높은 소리를 대신했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 가슴이 뜨겁게 처리하기도 했고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끝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기도 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지랄 맞은 지점. 보통의 데시벨이지만 가장 지랄 맞은 지점이라고 말했다.



많은 데시벨을 만났다. 귀가 피로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앞사람의 입 모양만 보일 때가 있다. 입 모양을 보며 말하는 것을 알아채지만 귀는 듣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마치 들어야만 하는 말만 골라 듣듯 기억 한 편이 쏙 빠진 것처럼 흘러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