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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像, 想)의 굴레

by 이종열

눈이 떠지고 화들짝 잠에서 깨었다.

석호가 군대 갔다 온 나이 서른 넘은 남자들 대부분이 한두 번은 꾸어 보았을 갔다 온 군대에 다시 오라는 입영통지서를 받은 듯한 꿈을 꾸고 나서였다.

서너 해 전쯤부터 석호의 새벽녘 꿈은 거의 이런 잡꿈들을 꾸면서 깼다.


퇴직한 지 8년이 넘은 직장에서 다시 출근하라는 통지를 받는 꿈이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 잠을 깬 것을 보면 근무하였던 그때가 꽤나 힘들고 꽤나 고달팠나 보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검고 무거운 커튼이다.


창 밖은 아직 여명(黎明)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얇게 켜진 가로등 불빛만이 외롭게 도시의 어둠을 밝히고 서 있다.


지금 시간이 새벽 서너 시쯤은 되었을 것 같다.

꼭 시계를 보고 확인하지 않아도 서너 해 경험치로 알 수가 있다.


이제 곧 틀림없이 새벽의 여명은 밝아 올 것이고 가로등 불빛들은 꺼져 서로가 자리바꿈을 하리라는 것도 삶의 경험치로 알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다녀온 짧은 시간에 몇 가지 생각들이 석호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잽싸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다.


아무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였지만 허사였다.

생각이 생각을 지우지 못하였고 생각이 생각을 이기지 못하였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아직 바깥이 캄캄한 지금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석호는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생각들을 내 보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와 앉은 생각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잡념들이었다.

지금은 그저 다시 누워 잠을 청하는 것 밖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리에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 두어 시간만 더 자자

그러자...


이 생각조차 머릿속에 미리 자리 잡은 잡념과 한 통속으로 늪 속에서 같이 허우적 댄다.

잠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잡념들이 어느새 상념으로 변해 머릿속을 헤엄치고 다니면서 석호를 잠의 세계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생각을 지우려고 한 생각이 또 다른 생각들을 불러왔다.


오늘은 더 누워 있어 봤자 다시 잠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서너 해 동안 늘 똑같이 그랬지만 그래도 전에 몇 번 운 좋게 다시 잠들었던 기억에 잠을 청하였으나 오늘은 그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예 일어나 침대 끝터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석호의 잠을 밀어냈던 상념들은 이제 대놓고 그의 머릿속을 헤엄치며 다닌다.


그 상념들은 얕은 물가를 헤엄쳐 다니는 송사리 떼들처럼 이리로 왔다가 이내 저리로 몰려갔다.


젊었을 적

아니 얼마 전까지 석호는 이런 복잡한 생각들을 지우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때 석호는 일어나는 상념들과 한가롭게 어울려 놀 시간이 없었다.

오늘 당장 출근을 해야 했고 약속된 다른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출근할 일이 없고 오늘은 딱히 약속된 다른 일정도 없다.


상(想)이란 수시로 일어났다가 수시로 사라지고 수시로 변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이제는 안다.

그것이 상(想)의 근본 실체라는 것도ㆍㆍ


꽤 많이 상(想)과 마주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옛날 자신이 살아왔던 일들이 하나씩 스치며 지나갔다.

어렸을 적 자신을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던 가난이 상념으로 살아났다.

가난의 늪에서 빠져나오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들은 당신들의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고 살았다는 생각과 그 숙명을 아무 대책도,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이 자식인 자신에게 물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의 숙명을 자식들의 숙명이라 여기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신들 앞에 놓인 가난을 가난이라 여기지 않고 그저 닥친 하루 일과라 여겼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가난에 굴복해 스스로를 비관하였거나 비굴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대견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 그러나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

이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빠르게 지나는 세월의 배에 올라타서 그 배가 가는 곳을 따라가면서 늙어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더 늙어질 세월조차 내게 없을 때쯤 나는 배에서 내려 또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그곳이 죽음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하루를 죽음을 향해 가는 것 밖에 없다.

나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


석호는 이 상념에서 벗어나고자 젊었을 적 자신이 빛났던 시절의 생각들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에 덧씌워 보았지만 그 생각은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의 힘에 이내 밀려나 버렸다.


... 그럼 죽기 전에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내가 가야 할 죽음의 골짜기는 또 어디이고 얼마나 깊은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가늠조차 힘든다.


누군가 ...너는 여기에서 왔고 지금의 너는 이렇고 나중의 너는 또 이럴 것이다... 속시원히 말해주면 좋으련만 지금 넓은 방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서리가 쳐지고 소름이 돋았다.

또 다른 생각이다.


... 나는 누구인가?...

젊었을 적 석호는 이런 말을 하는 누군가를 보면 -도(道)를 아십니까?-하며 수염을 기르고 남루하게 옷을 입은 기인(奇人)쯤이라 여기고 그에게서 떨어져 걸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자신이 그 상(想)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 나는 누구인가?...


몸을 만져 보았다.

푸석하고 탄력 없는 몸이 자신이 지금 나이 들고 늙어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 지금의 나는 아무 존재가치가 없고 쓸모조차도 없는가?...

비관과 부정의 생각들이 도무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유영(游泳)하며 다니고 있다.

자존감도 같이 떨어졌다.


...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늙어가고 이렇게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나만 이런가?...


석호의 상념들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사라졌다가 생기고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은 아직 석호의 마음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앉아 구렁이 마냥 혀를 날름거리며 석호를 노려본다.


창문에 매달려 있던 아침 햇살이 젖혀진 커튼 사이로 일시에 석호의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얇은 빛으로 어둠과 마주하고 서있던 키 큰 가로등은 불을 끈 채 드문드문 추수가 끝난 밭을 지키는 허수아비 모양으로 서있다.


빛이 석호의 두려운 마음을 조금은 덮어주었다.


-까톡!-

침묵으로 고요한 석호방의 적막이 일순간 문자 오는 휴대폰 소리에 깨졌다.


석호가 직장을 가지고 있었을 때 문자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다.

바쁜 자신의 오늘의 일정에 다른 일정 하나를 더 갖다 얹는 불편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직장을 떠나자 하루에 그렇게 많이 오던 문자, 전화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루에 한 통의 전화조차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 꽤나 많은 세월을 흘려보냈다.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벗님들

잘들 지내고 계시는가?.............-


... 아!

오늘의 그 모임날이구나...


석호가 속으로 생각하였다.


오늘이 7월과 12월

1년에 두 번하는 고등학교 반창회 날이었다.

그동안 계획된 하루의 일과를 휴대폰 달력에 꼼꼼히 잘도 적어왔는데 오늘의 일정은 기록을 깜빡하였다.

총무가 재차 일러주지 않았으면 자칫 참석하지 못할 뻔하였다.


석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같은 반 친구들의 수가 47명이었는데 지금 반창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친구는 열명 남짓하다.

어떤 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고

또 어떤 친구는 멀리서 살고 있고

그중 셋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다.


살아가면서 석호가 그나마 자신의 속엣말을 하고 말을 하면서 웃을 수 있는 모임이 이 반창회가 유일무이하다.

석호가 언제부터인가 이 모임을 기다렸다


오늘은 아예 모임에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다.

오랜만에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그동안 속에 삭이고 있었던 속엣말을 실컷 하려고 차를 집에 두었다.


그는 오늘 모임이 아주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으면 하고 내심바랬다.

아니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으면 바랬다.


도착한 식당 주인이 미리 예약된 방을 안내해 주었다.

석호가 약속시간 보다 10여분을 일찍 도착하였는데도 이미 다섯 명의 친구들이 먼저 와서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친구

어이 석호

하~ 이자슥 석호-


손을 흔들며 석호를 반기는 친구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 제각각이었다.


반가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그때 솜털이 뽀송거렸던 친구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깔려 있었고 그 많았던 머리숱들이 이제는 거의 다 빠져 머릿밑이 훤히 보이는 친구들이 태반이다.

누가 봐도 늙은이이고 잘 봐주면 중년이었다.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


석호가 벽에 붙은 옷걸이에 옷을 걸고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이 날아온다.


- 한잔 해라.

근데 니 요새도 소주만 묵나?-

길수가 잔을 받아 든 석호를 보며 웃으면서 말한다.

잔에 소주가 채워졌다.


-그라마 서민이 소주를 무야지(먹어야지)양주를 우예묵겠노?

하이고~

내 평생에 마음 놓고 허리끈 팍 풀고 양주한번 실컷 묵어 볼 날이 오기는 하겠나?-


석호가 길수가 따라준 소주를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문디 자슥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가 뭐 어때서?

매달 연금 꼬박꼬박 나오제, 느그 아들, 딸들이 저그 아부지 돈 떨어지면 계좌로 따박따박 넣어주지.

니가 뭐가 아쉽어가 소주가 어떻고 양주가 어떻고 캐샀노?

내사마 오늘 여기 나온 친구들 중에 석호니가 젤로 부럽구만은ㆍㆍ-


병태가 한 손은 석호의 어깨에 얹고 다른 손으로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문디 자슥

느그는 속 모리는(모르는)소리 쫌 작작해라.

인생 육십 중반쯤 살아보이끼네 돈이 전부는 아이더라.

나도 소싯적에는 돈만 있으마 못할끼 없다고 생각하고 죽어라 돈만 쫒았는데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이 허망하다.

다 허사더라.

이기(이것이) 뭔고 싶다.-


석호는 자신에게 인마, 자슥이라 부르는 반 친구들이 하나도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음이 신기하고 또 그것이 편하였다.


오늘은 빨리 취하고 싶었다.

어서 취해서 아침에 자신의 머릿속을 유영(游泳)하였던, 어쩌면 아직도 자신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잡념들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어서 취해서 자신과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에게 어 풀어져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싶었다.


석호가 도착하고 30분쯤 흘렀을 때 오늘 오기로 한 친구들이 다 모였다.

11명이었다.


석호와 친구들의 입에서는 연신 인마, 이놈, 이자식 하는 통속적인 호칭들이 흘러나왔고 테이블에 술병은 늘어났다.

나이 들수록 말을 고상하게 해야 하고 행동은 고급지게 해야 한다는 통속과 교과서적인 말들에 오늘은 얽매이고 싶지 않다.


술이란 게 희한하다.

정신 차리고 먹어야 할 접대자리 술은 정말 잘 취하지 않고 마음을 놓고 허리끈을 풀고 마시는 술은 잘도 취한다.


석호가 앉은 탁자에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가더니 어느새 다섯 병이나 되었다.

지금껏 반듯하였던 자세가 흐트러지고 지금껏 정확하였던 말이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혀가 꼬였다.


지금껏 석호가 반창회에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적이 없었다.

지금껏 석호가 반창회에서 이렇게 자세가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전에 없던 석호의 일탈에 다른 친구들 전부는 스스로의 정신줄을 잡고 있었다.

절주(節酒)하고 말을 줄였다.

-야가(얘가) 오늘 와이카노?

무신 일있나?

아니면 어디 아푸나?-

석호의 귀에 걱정하는 친구들 말이 한 여름 천장 위를 높게 비행하는 모기소리처럼 약하게 들렸다.


석호의 어깨가 작게 덜 썩였다.

길수와 병태는 물론 다른 친구들 모두 석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예, 이 친구 마음이 터졌구나.

터지고야 말았구나...

병태는 최근 석호의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병태가 얼마 전 석호의 SOS신호로 둘이 만나 그의 지금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석호의 아픔을 들은 병태도 처음에는 지금껏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오다 갑자기 멈추어 섰는데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고 자신이 그렇게 중하게 여기고 귀히 여기며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것들이 한낮 돌덩이에 불과하더라,

이제 자신은 세상 어느 곳에도 쓸모가 없이 그저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느껴진다고 하는 뭐 중년의 남자들 대부분이 느껴 보았고 느끼고 있는 그런 통속적인 갱년기쯤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병태는 석호의 말 중간 어디쯤에선가 -이제는 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지금 그 방법을 찾고 있다-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래도 설마 싶어 병태가 물었다.

-그래 니 그 방법이라는 기 뭐꼬?

죽기라도 할라카나?-


-내사마 죽음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이라꼬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 자는 것이 죽는 것이 똑같다고 생각했는기라.

둘 다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을 자는 거는 꿈도 꾸고 또 그 꿈 때문에 잠을 깨지 만서도 고마 죽어뿌마 꿈도 안꿀끼고 더군다나 깨지도 않을꺼 아이가?

죽었다가 깨어났다 카는 사람 나는 아직 못봤데이-


식당 시계가 밤 10시를 넘겼다.

석호는 병태의 부축을 받고 그와 같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석호가 아직 들어오지 않는 집

거실에 불이 꺼져 있었고 건넛방에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술이 매일 꾸었던 잡꿈을 없애주지는 못하였다.

술이 매일 일어났던 상념들도 없애주지는 못하였다.


...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내 실체는 무엇인가?...


석호의 힘든 하루가 변치 않듯 신(神)의 시계도 변치 않고 정확히도 돌아가고 있다.

어제와 같이 여명이 밝아오고 어제와 같이 가로등불이 꺼졌다.


-띠리릭-

집 현관 자동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 아내가 출근하나 보다.

지금 시간이 아침 8시구나...

아내의 일상적인 출근에 석호의 습관적 생각이 겹쳤다.


이제 넓은 아파트에 석호 혼자다.

얼마 전까지 키우던 강아지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대여섣달은 된 듯싶다.


아내가 집을 나서자 외로움이 쓰윽 석호 옆으로 당겨 앉는다.

... 이것이 외로움인가?

아니면 고요함을 내가 외로움이라 느끼고 있는가?...

희한하게 쌉쌀한 행복감도 같이 석호 옆으로 앉는다.


-삐리릭~~-

석호의 휴대폰이 울린다.

순간 석호는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이 백 년에 한 번 피는 희귀화(稀貴花)처럼 느껴졌다.


-이 아침에 누가?-

석호가 구시렁거리며 침대 옆 탁자에서 울고 있는 휴대폰을 열었다.

병태였다.


- 니 설마 아이(아직)자고 있는거는 아이제?-

전화를 받자마자 병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문디 자슥

지금 시간에 잠은 무슨 ㆍㆍ-

자신이 늘 새벽 서너 시에 잠을 깬다는 것을 잘 아는 병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살짝은 괘씸하였다.

-근데 니 이 시간에 와 전화했노?-

석호 말이 여전히 퉁명스럽다.


-니 오늘은 아무 소리 하지 하지 말고 내하고 당장 어디 쫌 가자.

오늘 갔다가 모레 올끼다.-


병태의 말이 느닺없고 급작스러웠지만 단호하였다.

오늘 당장이라는 말과 오늘 갔다가 모레 온다는 말에 살짝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야이 문디 자슥아

내가 아무리 늙으막하다 캐도 시커먼 머슴아 놈하고 단 둘이 여행은 안갈란다.

그것도 이틀밤을 같이 자야 되는 2박 3일을...-


석호의 말은 조금 전 병태가 한 말보다는 덜 단호하였다.


-니 자꾸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부터 준비해라.

딱 이틀밤을 보낼 준비만 하면 된다.

내가 한 사간뒤에 느그 집으로 내차로 데리러 갈끼다.

그라고 니가 말하기 뭣할 것 같아서 내가 어제 제수씨한테 니 이틀 빌려간다 캤으끼네 느그 마누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알았제?

끊는다.-


병태가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급작스런 병태의 전화에 잠시 당황스럽기는 하였지만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친구와의 이틀 여행.....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실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가 정확히 9시를 만 지날 때 병태가 지금 아파트 마당에 도착하였다고 전화로 알렸다.


-니 지금부터 내한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마라.

내가 클래식을 틀어 줄테이끼네 의자 뒤에 기대가 한숨 푹 자라.-

석호가 차에 타자 병태가 먼저 설레발을 쳤다.


-야이 미친 놈아

최소한 내가 어디로 기는지는 알아야 될거 아이가?-

석호의 목소리가 자동차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조금 더 컸다.


-걱정하지 마라.

다 늙은 니를 섬에 팔지도 않을끼고 다 썪어 문드러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니 장기를 꺼내 팔지도 않을끼니까.

그냥 눈감고 한숨 자라.-

병태가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석호의 머리를 의자 받침대로 밀면서 말했다.


석호가 머리를 의자에 눕히자 차 안이 일시에 침묵에 휩싸였고 그 침묵이 고요를 낳았다.

고요 속을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헤엄치 듯 차 안을 회전하였다.


순간 석호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하였던 편안함이었다.


이대로 섬에 팔려가도, 자신의 장기가 누군가에 팔려가도 크게 두려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눈을 감았다.

.... 참으로 마음이 편안하다.

이렇게 살면 되는데.....


이 생각까지만 하고 생각의 끈이 끊어졌다.


-야!

인자(이제) 일나라.

도착했다.-


병태의 말에 석호가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감았는데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왔다고 병태가 말했다.

자동차에 시동도 꺼지고 클래식 음악도 자취를 감추었다.


퍼뜩 정신이 들지를 않았다.


머리를 들어 바라본 차창 밖 바깥의 모습은 온통 적송(赤松)들로 싸인 산 중이었다.


-여가(여기가) 어디고?-

석호가 물었다.


-정신차리가 내리라.

내리보마(내려보면) 안다.-


병태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열린 문 안으로 상쾌한 공기가 차 안으로 일시에 몰려 들어왔다.

솔잎 향기가 석호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둘이 도착한 곳은 김천(金泉)에 있는 절이었다.

아담한 사찰이었는데 지어진 지 백 년쯤 되었다고 병태가 말했다.


그리고 보니 병태가 틈만 나면 가는 절이 있다는 소리를 몇 번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병태가 석호를 앞세우고 절 마당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고요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참매미 소리와 지붕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전부였다.


조금 전 차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을 때와 같은 편안함이 매미소리와 풍경소리에 묻어있었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호는 병태에게 여기가 어디이고 자신을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묻지 않았다.

친구 병태가 마음이 심란한 자신을 위해 고요한 절에서 하루쯤 몸과 마음을 푹 쉴 수 있게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주었구나 짐작하였다.

그런 병태가 고마웠다.


마당을 지나자 열개 남짓의 돌계단이 나왔다.

돌계단의 끝에 있는 법당으로 병태가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三拜)하였다.

병태는 석호더러 법당으로 들어가자, 부처님께 삼배하자 말하지 않고 혼자 들어갔고 석호는 법당 밖에서 병태가 삼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법당을 지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꽤나 오래되었을 것 같은 문을 열자 두 스님이 합장으로 둘을 맞았다.

둘 다 세수(世壽)로 40대쯤은 되어 보였다.


병태도 두 스님에게 합장으로 절하였다.


절하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석호도 병태와 같이 스님에게 합장을 하였지만 병태의 합장은 불자(佛子)의 그것이었고 석호의 합장은 처음 본 낯선 사람에게 하는 인사의 합장이었다.


육십 평생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합장의 절이었다.

석호자신이 스님을 이렇게 지척에서 보는 것조차 오늘이 처음이었다.


주지스님은 오늘 종단행사에 참석하셨는데 얼마 있지 않아 오실 거라고 비구스님 중 한 분이 묻지도 않은 병태를 보며 말했다.

그 비구스님이 둘을 주지스님 방으로 안내하였다.


스님과 병태는 서로 알고 지낸 지 꽤나 오래된 듯 보였다.


들어선 주지스님의 방은 두어 사람이 누우면 딱 맞을 작은 방이었는데 깨끗하고 정갈하였다.

방안의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적재적소(適材適所)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벽에 걸린 주지스님의 평상복이 해져 있었다.


석호도, 병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자칫 서로의 말소리가 산사(山寺)의 고요를 깰 수 있겠다는 둘의 생각이 같았다.


그저 열어놓은 방문 안으로 떼창으로 울어대는 초저녁 매미소리와 바람이 조금 전 보다 더 일어 나는 풍경소리가 들어왔다.


... 오늘은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석호가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큰 스님~~-

산사의 고요가 일순간 깨졌다.


병태가 서둘러 일어나자 석호도 얼떨결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분의 동자승(童子僧)들이 일시에 마당으로 뛰어가 누군가를 맞이하였는데 석호는 저분이 주지스님이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냐 이눔들

잘들 지내고 있었느냐?-

처음 본 주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근엄하였고 근엄한 듯 인자하였다.


병태가 주지스님 앞으로 가서 합장으로 인사하였다.

석호도 병태 옆에서 주지스님과 인사하였다.


-예, 거사님~

그간 무탈하셨지요?-

주지스님도 둘을 보고 합장하였다.


조금 전 보다 매미소리는 작아지고 풍경소리는 더 커졌다.

오늘 밤은 바람이 꽤나 부려는 모양이다.


저녁공양을 마친 비구승 둘이 종각(鐘閣)에 범종(凡鐘)을 울렸다.

비구승 둘은 한참 동안 종을 울렸고 종소리는 산속 깊은 곳으로 퍼져나갔다.


-저 스님 둘이 저렇게 오래 종을 치는 이유를 니는 잘 모리제?-

마당에 서서 종각을 보고 선 병태가 옆의 석호에게 물었다.

대답 대신 석호가 병태를 쳐다보았다.


-저 종소리가 나는 시간만큼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가엾은 영가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멈추어진단다.

그런 부처님의 자비가 지옥의 영가들에게까지 전해 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저리도 오래 타종을 하는게지.-


병태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서도 내 생각은 저 종소리에 중생들의 아둔한 생각(想)을 깨고 삶의 무게(像)를 깨라는 부처처님의 뜻일기라-

병태의 말이 종소리에 묻혔다.


석호는 처음으로 병태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고 오늘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종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사찰의 여섯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 저녁 예불을 드렸다.

예불드리는 주지스님의 목소리와 풍경소리가 어우러져 산사의 고요에 앉았다.


방으로 들어와 앉은 주지스님과 둘의 앞에 차(茶)가 놓였다.

어리디 어린 동자승 셋이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주지스님과 둘의 사이에 작은 찻상을 놓고 설록차를 내놓고 방을 나갔다.


잠시 방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큰 스님!

도시 상(想,像)이란게 무엇입니까?

왜 중생들은 일평생 상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석호의 질문에 침묵이 깨졌다.


-앞에 놓인 차(茶)를 드시고 어서 잠자리에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몸이 곤할거요.

비구들이 거사님들이 하룻밤을 묵을 방을 청소해 두었을 겝니다.-


병태의 질문은 동문(東問)이었고 주지스님의 답은 서답(西答)이었다.


방의 침묵을 차 마시는 소리가 메웠다.


-그럼 큰 스님

저희는 이만 방으로 가서 쉬겠습니다.

큰 스님께서도 평안한 밤 되십시오.-

석호와 병태가 합장으로 뒤돌아 방을 나서려 순간 등 뒤에서 주지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쯧

어린 동자승들도 아는 이치를 어찌 어른이 모른단 말인가?
쯧쯧쯧-


주지스님의 말뜻을 되묻지 않았다.


산사(山寺)의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도심의 차소리 대신 아침 새들의 지저귐이 있었고 가로등 대신 아침 햇살이 석호를 깨웠다.


그리고 보니 어젯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잔 듯하였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잔 듯싶다.

몸이 개운하고 정신이 맑다.


-오냐

내 다녀오마.-

어느새 큰 스님이 출타복을 입으시고 마당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 앞에 비구승 둘과 세 명의 동자승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서있었다.


-오늘 내가 너희 셋 놈 동자들한테 숙제를 줄 터이다.

내가 저녁에 다시 들어올 때까지 전부 풀어놓거라.

알겠느냐?-


-예, 큰 스님-

주지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근엄하였고 동자승들이 목소리는 천진하고 맑았다.


-여기 너희 셋 앞에 동그란 원(圓)이 하나씩 그려져 있다.

보이느냐?-

주지스님이 동자승들을 하나씩 쳐다보며 말했다.


세 명의 동자승들 앞에 지름이 1m쯤 되는 동그란 원이 그려져 있다.


-내가 저녁에 다시 돌아왔을 때 너희가 앞에 있는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매일 저녁을 굶길 것이고 동그라미 밖에 있으면 매일의 점심을 굶길 것이야.

내가 나가고 너희 셋은 서로 의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

각자의 판단을 내가 보려는 것이다.

만약 내 말을 어기는 놈은 내가 돌아오면 경을 칠 것이다.

그리 알아라.-


주지스님은 두 비구승을 불러 어린 동자승들의 조우를 감시하라 지시하였다.


주지스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당을 나가 모퉁이 길을 돌아서 지나가 버렸다.

동자승들이 큰 스님의 축지법을 보았다.


이를 지켜본 석호와 병태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어쩌란 말인가?...


답은 오로지 두 개밖에 없었다.

점심을 굶느냐, 아니면 저녁을 굶느냐.


석호의 마음속에 어린 동자승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주지스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함께 일었다.

... 어쩌란 말인가?...


어제 자신이 여기로 왔을 비슷한 시간에 아침에 출타하였던 주지스님이 마당에 들어섰다.

두 젊은 비구승과 세 명의 어린 동자승들이 주지스님을 마당에서 맞이하였다.


동자승 앞에 그려진 동그란 원이 아침의 형상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너희 결심을 내게 보이거라.-

주지스님이 동자승들에게 말했다.


첫 번째 동자승이 동그라미 밖에서며 말했다.

-큰 스님, 저는 차라리 점심을 굶겠습니다.

저는 저녁을 먹지 않으면 도무지 배가 고파 잠을 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두 번째 동자승은 원 안에 서면서 말했다.

-큰 스님, 저는 저녁을 굶겠습니다.

저는 매일 저녁 저녁예불이 끝나면 배가 고파지기 전에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 번째 동자승의 생각은 달랐다.

큰 스님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스님이 직접 그리신 원을 지워버렸다.


그 순간 두 비구승과 석호, 병태의 얼굴이 같이 일그러졌다.

...저 동자승 이제 큰일이다....

넷의 생각이 같았다.


이를 지켜본 두 명의 어린 동자승들의 머리가 땅으로 향하면서 눈을 감았다.


-네 이놈.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니가 감히 내가 그린 원을 지워?

도대체 니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 짓을 한 것이야?-


큰 스님의 목소리는 추상(秋霜)과도 같았고 두 눈은 사천왕의 그것과도 같았다.


-큰 스님

제 생각에는 스님께서 그려주신 그 원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그 원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도 그 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없었던 문제의 원만 없애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 원이 상(像)이었고 안 밖을 갈등하는 그 원이 상(想)이었습니다.

원이 없으니 상(想,像)이 없고 제가 점심을 굶을 일도 저녁을 굶을 일도 없습니다.-


주지스님이 크게 웃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병태가 석호에게 말했다.


-석호야.

니 안에 있는 그 원(圓)

인자는 지아뿌라(지워 버려라)

니가 그렸으끼네 니 손으로 지아뿌라.-


석호가 병태의 손을 잡았다.


둘의 침묵을 클래식 음악이 채웠다.

석호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문디 자슥

니 맨날 그래 줄줄 우는 거 느그 마누라하고 느그 새끼들은 아나?-

병태의 장난스런 손짓에 석호의 머리가 흐트려졌다.


3년간 석호의 상(想,像)의 굴레를 어린 동자승이 일순간에 벗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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