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에엑!!~~
역(驛)으로 들어오고 역에서 나가는 열차들이 무시로 울어대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방금 막 역에 도착한 열차는 긴 여정의 고단함으로 울었고 이제 역을 출발해서 서울로 떠날 열차는 미리 예단한 고단함으로 울었다.
울음소리가 크고 깊었다.
열차들은 기관차 머리 위로 하얀 증기를 뽑아내며 늙은 몸을 출발시키고 세웠다.
드나드는 열차는 때로는 한(恨)의 소리로 곡(哭)으로 울고 때로는 고단함으로 흐느끼며 울었다.
열차들이 한(恨)과 고단함으로 울고 곡할 때 내 막냇동생 원이는 기함(氣陷)으로 울었다.
열차들이 내지르는 급작스런 소리에 막내는 얼굴과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울었고 막내의 울음소리는 늘 열차들이 내지르는 소리에 묻혔다.
어렸을 때 내가 살았던 집은 경부선 열차들이 꼭 쉬었다 가는 대구역에서 1km 남짓 거리에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으로 있었다.
두메산골 시골에서 살다가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양모(養母)를 떠나 이곳 생부모 집으로 전학 왔다.
열차!
막내가 기함하며 무서워하는 그 열차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내게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희한한 존재였다.
꿈에서 그리던 것이었다.
대구로 전학오기 전 내가 살았던 시골은 산골 오지에 있었다.
그곳의 해는 늘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마을에 칠흑(漆黑)과 고요를 남겼다.
마을을 덮고 있는 칠흑의 어둠은 호롱불이 밝히고 어둠밑에 깔린 고요는 마을 개들이 깨웠다.
마을 개가 짖지 않는 어떤 날의 고요는 마당으로 기어가는 두꺼비 발자국 소리가 덜어주었다.
두꺼비들은 거의 저녁보슬비가 오실 때 떼로 몰려나와 마당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어가면서 세월을 죽였다.
그런 날~
나는 자주 방 부뚜막에 내려앉아 읍내 쪽을 멍하니 보곤 하였다.
읍내를 보고 있는 내 눈은 이내 집 가까이에 있는 산(山)들에 막혔고 어린 내 시선과 상념들은 산 중턱을 넘지 못하고 그곳에 주저앉았다.
... 대체 저 산 뒤의 읍내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읍내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고개를 숙이고 산(山)에서 시선을 뗀 어린 내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꽤에엑!!~~
동네어른 누군가 한테 들은 소리가 생각났다.
-열아!
니 읍내에 가마(가면)차(車)들이 스무 대가 넘게 서로 줄을 묶어가 곱빼로 댕긴데이.
그중에 한 대가 앞서서 그 묶인 스무 대를 끌고 댕긴다 아이가
그것을 열차라 카는데 그 열차들은 도로로 댕기는기 아니고 쇳덩어리 길로 댕긴다.
철길로 댕긴다 이 말이다.
그라고 그 열차가 내는 소리는 우리 마실에 한 번씩 들어오는 버스 하고는 비교가 안되는기라.
꽤에엑!!!
칸다.-
...그래 지금 들리는 저 꽤에엑 소리는 분명 열차가 내는 소리일 거야...
부뚜막을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방금 내가 열차소리를 들었다.-
흥분한 나를 엄마는 늘 같은 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래, 우리 곧 열차 구경하러 읍내로 가자.-
그때 내가 늘 꿈속에서 그렸던 그 열차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지척에서 떼로 들어오고 떼로 나가고 있다.
거기에다 부뚜막에 앉아서 들었던 그 소리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내 옆에서 울어대고 있다.
역을 출발한 열차들은 이내 내가 살고 있는 단칸방 옆을 지나갔다.
철길과 내가 앉은 방 사이는 20여 m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낮은 벽돌담이 있었다.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와 역에서 나가는 열차가 서로 교행(交行)이라도 하는 날은 지축(地築)이 흔들리고 집이 통째로 흔들렸다.
벽돌담을 뒤흔든 열차들은 또 하얀 연기와 함께 긴 여운의 소리를 남겼다.
꽤에엑!!~~
그럴 때 막냇동생 원이는 형제 중 누군가가 귀를 막아주었고 지 옆에 아무도 없을 때는 지 귀를 지가 막았다.
어느 날은 벽돌담 너머로 남자 중절모 하나가 날아 넘어 들어와 방 앞마당에 떨어졌는데 그 모자를 확인한 생모가 식겁하였다.
열차에서 용변을 참지 못한 어떤 이가 자신의 모자를 벗어 그곳에 용변을 보고 창 밖으로 던졌는데 그게 하필 한 평도 안 되는 우리 집 마당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집!
작은 대문 하나를 두고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여섯 가구가 살았던 그 집
그곳에 우리 집은 방이 한 칸이었다.
다섯 평 남짓하였다.
방 옆에 작은 부엌이 딸렸고 부엌 위로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겨울 어느 날
시골에서 누나인 나의 생모를 보러 오신 막내 외삼촌이 그 다락방에서 혼자 잠들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염라대왕님 앞까지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 작은 단칸방에 내 생부모와 누나 둘, 남동생 둘,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누나와 남동생들은 매일 콩나물 자라듯 자랐고 그때마다 가뜩이나 좁은 방은 점점 더 좁아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시골에서 올라와 나까지 복잡함을 보탰다.
일곱 명의 식구가 되어 버렸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불하나와 그 이불을 얹을 수 있는 앉은뱅이 찬장이 방에서 가장 큰 물건이었고 문칸쪽에 허리를 고무줄로 허리를 묶은 낡은 라디오 한 대가 유일한 문화도구였다.
그 라디오는 생부외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생부만이 그 라디오를 만질 줄 알았다.
나와 남동생 둘은 국민학생이었고 누나 둘은 중학생이었다.
우리 다섯 남매 모두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얼추 두 어시간 내외로 비슷하였다.
남동생 둘은 아직 저학년이라 숙제가 없는 날이 많았지만 나와 누나 둘은 학교에서 받아 온 숙제가 한 짐이었다.
제일 먼저 학교에서 집으로 온 내가 밥상을 방 한가운에 폈다.
밥상 네 다리 중 어느 한 다리는 꼭 고장이 나서 펴지지 않았지만 그것에 익숙한 우리 5남매는 기가차게 고장 난 밥상 다리를 폈다.
밥상 위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내게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누나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한마디 한다.
-열아
니 인자 쫌 방에서 나가라.
내가 교복도 쫌 갈아입어야 되고 오늘 숙제가 쫌 많다.-
숫제 명령조다.
여기에서 밀리면 나는 남은 숙제를 방바닥에 엎드려서 해야 한다.
밥상을 붙잡고 사수해야 했다.
그러나 벌써 중학생이 된 누나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에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사나이 대장부가 아낙이 옷 벗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눈물을 머금고 밥상에서 철수를 하여야 했다.
조건을 붙인 철수였다.
1. 밥상 위에 있는 내 책과 공책을 그대로 둘 것
2. 옷을 다 갈아입고는 바로 방을 비워줄 것
그러나 그 조건은 일방 나만의 조건이었고 누나는 동조한 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조건은 무효였다.
어쩌면 애당초 성립조차 하지 않은 조건이었다.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밥상 위에는 누나 책들이 얹혀 있었고 내 책과 공책들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더 이상의 싸움과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리고 가난한 나는 일찌감치 알았다.
방바닥에 엎드려서 남은 숙제를 마쳤다.
나를 밥상에서 쫓아낸 작은 누나는 얼마 있지 않아 학교에서 돌아온 한 살 위 큰누나한테 내가 조금 전 밀렸던 것처럼 밥상을 양보해야 했다.
어린 나는 통쾌함에 쾌제를 불렀다.
좁은 단칸방에는 큰누나가 밥상에서 숙제를 하고 끗발에서 밀린 나와 작은누나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숙제를 해야 했다.
그때 큰 누나는 입에 같은 말을 달고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나는 꼭 방이 두 개 있는 집을 얻을 것이고 내 방에는 꼭 농(장롱)을 들여놓을 것이다.-
큰누나의 밥상차지도 세 시간 천하(天下)였다.
가게 문을 닫은 생부가 집으로 오시면 방에서의 다섯 남매 모든 일정은 그때부터 all stop이 되었다.
다섯 평 단칸방은 생부께서 차지하셨고 아직 숙제를 못 마친 누군가는 알아서 구석진 방의 위치를 찾아 남은 숙제를 해야 했다.
생부는 가부장적이셨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헌법처럼 중히 여겼던 분이셨다.
그런 생부도 어떤 날은 구석진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숙제하는 당신의 자식들이 안쓰러우셨는지 마을 어른들과 내기장기를 두러 간다시며 방을 비워주기도 하셨다.
숙제 때문에 펴진 밥상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펴진 다리를 접고 조금 전 지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내 생모께서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어 방으로 들이시면 그때서야 밥상은 책상의 역할을 마치고 본연의 임무인 밥상의 역할을 하였다.
작은 밥상에 둘러앉은 일곱 명의 식구
생모는 늘 자신은 배가 고프지 않다시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좁은 방에 당신이 앉을자리가 없어서 부엌으로 나가신 것을 어린 우리 5남매들은 몰랐다.
부엌 부뚜막에 혼자 앉아 천장을 쳐다보시던 생모의 눈을 어린 내가 정확히 보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촉촉하였으리라.
초저녁 열차가 또 긴 여운을 남기며 집 담벼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즈음
여섯 가구 아이들이 일순간 같은 마당을 지나 차가 다니는 도로로 뛰어 나갔다.
모기차가 부우웅 소리를 내며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모기차도 열차와 같이 하얀 연기를 뿜었고 소리를 내며 지나갔지만 열차의 그것에 비유할 바는 못되었다.
열차에 기함하던 막냇동생 원이는 모기차 뒤는 1등으로 따랐다.
100여 m를 뛰어 따라가던 아이들이 뜀 박을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몇 안 되는 동네 상점 간판에 네온사인이 들어오고 자동차들도 전조등을 켰다.
길 가에 키 큰 가로등들은 약한 전압으로 억지로 깜빡이며 밥 값을 하고 있었다.
밤에 가장 밝은 것이 달빛이었던 시골뜨기 내게는 이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희한한 세상이었다.
밤에 시골마을 간판이 반딧불이었던 내게는 이곳이 별천지였다.
어느 상점옆에 쭈그리고 앉아 도시의 밤을 구경하고 있는 내게 넋은 빠져 있었다.
놓은 지 오래였다.
-희야
아부지가 인자 들와가 자란다.-
낮에 열차소리에 울었던 막냇동생 원이가 나를 데리러 왔다.
원이 얼굴은 아직 눈물이 지니다니 흔적이 선명하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불은 이미 꺼졌고 마당 맞은편 담배창고 가로등이 희미하게 쓰러져 가는 판잣집을 비추고 있었다.
생부 코 고는 소리가 마당까지 들렸다.
오늘 하루 고단하셨나 보다.
단칸방에 모기장이 쳐져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 더 좁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 작은 방에 누워 잠든 식구들은 하나같이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반듯이 누워 버리면 다른 식구가 눕지 못한다는 가난의 학습이 몸에 베인 터였다.
가장 늦게 집에 도착한 내가 누울 만큼의 여백에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와 있었다.
밤새 오줌누러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좁은 방에 틈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수면 중의 무의식이 누군가를 반듯이 뉘일 테니 말이다.
오늘 새벽잠이 깨였다.
초저녁에 일찍 잠이 들어서인지 이른 새벽에 잠이 깨인다.
이제 일상이 된 지 꽤나 오래되었다.
창밖으로 여명이 비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혼자 잠들었던 방이 참으로 넓다.
그 시절 내가 살았던 단칸방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넓어 보인다.
그때 북적이며 한 곳에서 밥 먹고 한 곳에서 잠들었던 식구들은 이제 단 한 명도 내 곁에 없다.
생부모 두 분은 떠나셨고 작은누나와 동생 둘도 아마 나와 같이 넓은 방에서 잠들고 깨어날 것이다.
방 두 개에 농(장롱)하나를 꿈꾸었던 큰 누나는 아마 넓은 방에서 넓은 수랍장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새삼 고생하며 살았던 그때가 오늘 아침 문득 그립다.
혼자 피식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