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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은 검객을 만났을 때 빼는 것이야.

by 이종열

대근, 동수, 상열, 희찬

넷의 인연은 꽤나 길고 깊었다.

어렸을 적 넷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다.

태어난 날짜도 두어 달 터울로 비슷해서 그들 넷은 거의 비슷한 날짜에 생일 때만 먹을 수 있었던 완두콩밥을 먹었다.


한 번씩 마을에 흉년이 들어 쌀두지가 비었을 때 동수와 상열의 어미는 쌀 대신 완두콩에 보리쌀을 넣어 아들 생일상을 차려 내놓기도 하였다.


넷은 똑같이 공부도 곧잘 해서 늘 반(班)에서 5등 안에 들었고 성격도 비슷해서 서로 잘 어울려 다녔다.


대근의 말 한마디에 넷은 까르르 넘어가며 웃었고 상열의 행동 하나에도 넷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들 넷을 보고 친형제와 같다고 말하였다.


희찬은 아래로 동생 셋을 두었다.

그는 친동생 셋을 대할 때는 늘 대면대면 대하였지만 친구 셋을 대할 때는 살갑게 대하여 그의 아비와 어미한테 친형제보다 친구를 더 좋아한다는 나무람을 받기도 하였다.


선생님께 검사받은 일기장에도 그렇게 썼고 실제 그의 생각도 일기와 같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내내 그들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반(班)이 달라 수업을 늦게 마친 아이들을 위해 먼저 마친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늦은 아이를 기다렸다가 넷이 다 모였을 때 학교를 나서 함께 집으로 왔다.


그렇게 그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들 넷이 입학한 중학교는 그들이 졸업한 국민학교에서 어른 걸음으로 5분 거리에 토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일찍 집을 나와 등교한 중학생 형이 빠트린 학용품을 국민학생 동생이 전해주고 가는 일은 한 여름 논에서 제비를 보 듯 허다하였다.


중학교에서도 넷은 친형제처럼 어울려 다녔고 등하교도 같이 하였다.

그들이 다닌 중학교는 같은 학년에 두 개의 반(班)이 있었다.


1학년 때 대근과 상열이 1반으로 같은 반이었고 동수와 희찬은 2반으로 같은 교실에 앉았다.

넷은 쉬는 시간 종(鐘)이 울리면 약속을 한 듯 교실 밖 복도에서 만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며 쉬는 시간 10분을 함께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도 넷은 각자가 싸 온 도시락을 들고 운동장 모퉁이에 있는 철봉 밑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앉았다.

넷은 서로 싸 온 반찬을 모여있는 중앙에 두고 젓가락이 가는 대로 각자의 식미에 따라 도시락을 먹었다.


동수의 반찬통은 늘 김치와 무말랭이가 채웠고 상열의 도시락은 깜둥보리밥이 채웠는데 그나마 도시락의 여백이 보리밥보다 많았다.


반면 희찬의 도시락은 거의 쌀밥으로 채워졌다.

그의 도시락에서 여백은 볼 수 없었고 반찬통에도 계란말이가 있었을 때가 많았다.


아이들 넷은 서로의 도시락에 대한 빈부(貧富)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 이들의 어쩌면 특별한 우정을 6년을 보아온 다른 아이들은 그들 넷의 그런 행동들을 당연하다 여기기는 하였지만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교복과 모자를 쓴 모습만 달랐지 작년 국민학교 6학년 때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중학교에 진학한 것이 새삼 새로울 것도 없었다.


넷의 인생행로(人生行路)는 같은 방향으로 가는 같은 열차를 탄 듯 똑같았다.


중학교 3년도 또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철들고부터 늘 함께 하였던 일심동체의 그들 행로는 영원히 같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나와 영원히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신(神)이 정해놓은 운명이었고 인간들이 따라야 할 순리였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산골마을에 고등학교는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20년 가까운 같은 행로(行路)틀어지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동수의 집은 넷 중 가장 가난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전 재산인 두 마지기 논에 물을 대려 나갈 때 고무신을 아끼려 짚신을 신고 나갈 만큼 가난하였다.

동수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창피해하는 것을 눈치챈 아비는 동수가 없을 때 짚신을 신었고 동수가 집에 있을 때는 고무신을 신었다.


동수의 학업은 중학교까지였다.

동수 스스로가 아비, 어미의 가난을 못 본 체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였고 그런 동수의 작심(作心)을 아비는 속으로 고맙게 생각하였다.

아비의 마음은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동수는 학업보다 아버지를 돕는 농사를 선택하였지만 그 농사는 남자 둘이 매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두 마지기의 논과 한 마지기의 밭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일손을 돕는다는 동수의 진정한 뜻을 아비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수가 아버지의 손을 도와 농사를 시작하였을 무렵 우리나라에 근대화 바람이 일었다.

가난을 떨치자는 정부의 의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말로 산업화 바람을 일으켰고 얼마 있지 않아 새마을 운동이 함께 시작되었다.


그 근대화의 바람은 마을의 젊은 청년들 몇몇을 대도시로 떠나보냈고 그들은 농사대신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었다.

그들의 계산은 1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그들을 보고 공돌이라 하였고 공순이라 불렀다.


청년들이 마을을 떠난 영향으로 마을의 전답(田畓)은 늘 일손이 모자랐고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덕에 그 부족한 일손은 동수의 몫이었고 동수는 소작(小作)의 이름이지만 그가 짓는 논과 밭의 수는 점점 늘어갔다.


동수 아비는 그것을 조상님이 돌보셨다고 여겼다.


동수의 농사에 대한 열정과 지식은 다른 마을청년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커서 그가 농사를 시작하고 10년이 조금 지난 시점부터 그의 아비 발에서 짚신과 고무신이 벗겨지고 구두가 신겨졌다.

그는 두어 번 군수(郡守)가 주는 상(賞)을 받았고 어느 한 해에는 나라님이 주시는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근과 상열의 집 형편은 그래도 동수의 집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렇다고 둘의 어미, 아비가 둘을 편안히 대학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고 둘은 이미 집안 형편을 잘 알았다.


대근과 상열은 대도시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여가(여기가) 암만(아무리) 촌이고 우리 집이 암만 어렵다캐도 그래도 우리 집 장남은 고등핵교(학교)까지는 시키야 안되겠나?" 하는 마음은 대근이 아비와 상열 어미의 생각이 같았다.


대근은 대구에 있는 공고(工高)에 입학하였고 상열은 상고(商高)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들 둘의 학업도 고등학교까지였다.


여기에서 대학을 욕심내었다가는 농사짓는 늙은 부모의 등골만 빠진다는 것을 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등 3년 동안 공부도 취직이 될 만큼만 하였다.


3년 후 대근은 울산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기술자로 입사하였고 상열은 정부투자기관에 입사하였다.


그래도 이들 넷 중 집안 형편이 가장 좋은 사람은 희찬이었다.


아비는 장남 희찬을 불러 마주 앉게 하고 말했다.

"니 잘들어래이.

보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그리 넉넉지는 못하다.

그래도 이 아부지는 앞으로 우리 집안을 이끌어 나갈 이 집안의 장남인 니를 우야던동(어떻게 하던)대핵교(대학교)까지는 보내야 된다꼬 생각한다.

그러이 니는 학비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말고 인문계고등핵교(학교)를 지원해가 좋은 대학에 가거라.

내가 논을 팔고 밭을 팔고 소까지 팔아서도 니 대핵교(학교)는 꼭 졸업시킬끼라.

내 말 무신(무슨)말인지 니 알았제?"


아비의 바람대로 희찬은 대도시 인문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4년 후 졸업하였다.


희찬이 대학생일 때까지 이들 넷은 자주는 아니지만 인근에서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이야기들을 하였다.

넷은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녔을 때와 같이 서로의 말 한마디에 포복절도로 웃고 서로의 등을 치며 행복해하였다.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을 읍내에 있는 음악감상실에 가서 DJ에게 서로가 좋아하는 팝송을 주문하였다.

박스(box) 안의 DJ의 머리는 장발이었고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도끼빗이 삐져나와 있었다.


넷은 늘 토요일에 만나 일요일에 헤어졌다.


밥과 술, 음악감상비는 대근과 동수, 상열이 부담하였고 어쩌다 희찬이 돈을 내려고 하면 셋은 '학생이 돈이 어딨노?'하며 바지에 들어가려는 희찬의 손을 잡았다.


그때까지 넷은 서로에게 주어진 인연의 농도가 이미 흩어지고 옅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우정은 영원할 거라 믿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장가를 든 사람은 동수였다.

논과 밭에 써야 할 일손이 모자랐던 동수의 집과, 없는 형편에 입 하나라도 덜어야 할 각시집 형편이 맞아 동수와 아내가 화촉을 밝혔다.


없는 형편이라는 같은 조건에서 만난 둘은 서로를 가엾게 여기며 아끼고 사랑하였다.

딸 둘과 아들 둘을 슬하에 두었다.


대근은 동수가 장가든 그 이듬해 처음 맞선 본 여자와 결혼하였고 아들 둘을 두었다.


대근은 결혼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것은 남녀가 나이가 들면 그저 하게 되는 것이고 이왕지사 둘이 화촉을 밝혔으니 아들과 딸은 자연스레 얻어지는 결혼의 부산(副産)이라 여기고 있었다.


대근은 가장(家長)은 모름지기 열심히 일해서 식구들 밥 굶기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라 믿고 밤을 낮과 같이 일했고 자주 휴일특근을 자청해서 수당을 받았다.

상열은 그가 다니던 직장의 여직원과 결혼하였다.

상열의 착한 성격에 여자의 마음이 움직였고 여자의 정(靜)하고 단정한 행동에 상열이 반했다.


상열과 여자는 5년간 비밀스럽게 사내연애를 하였는데 둘은 아무도 모르게 한다고 하였지만 직원들 전부는 둘의 연애를 알고 있었다.


상열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자식으로 두었다.


그러나 희찬은 자신이 마음에 둔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없었다.

그의 아비와 어미가 여자집 형편이 자신들의 집에 비해 많이 기운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며느리감이 자신들의 아들 학력에 비해 많이 빠진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희찬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내 사시(司試)에 합격하여 법복(法服)을 입었다.


아들이 사시에 합격하였을 때와 판사로 임용되었을 때 희찬의 아비는 마을어귀에 현수막을 걸었다.


3년 후 그는 법복을 벗고 그의

동기생과 같이 서울 중심가에서 합동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넷은 이제 같은 방향으로 달리던 기차에서 내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로의 처자(妻子)가 넷의 우정보다 앞섰고 직장의 현실들이 서로에 대한 그리움보다 우선하였다.


사람의 뇌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물들을 다른 봉지에 넣어 두었다가 점차 녹여 크기를 작게 만들었다.

넷은 자신들의 처자들과 직업이라는 현실의 굴레에서 서로 조금씩 잊혀 가는 존재였다.


모든 사람들의 삶도 그러하였다.


그렇게 세월도 갔다.


대근과 상열은 같은 해 각자의 직장에서 똑같이 부장의 자리에서 희망퇴직하였다.

그때 그들 나이가 58세였다.


고졸의 신분에서 더 이상의 진급은 어쩌면 한 여름 강가에 떠있는 무지개 같았고 신기루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 아프고 아쉽지는 않았다.

둘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생각하였다.


동수는 큰 아들이 자신의 농사를 이어받았는데 얼마 전 큰 아들이 농기구들을 기계화하는 바람에 농사에서 완전 손을 떼고 아들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집을 짓고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


젊었을 때 미리 넣어둔 연금으로 생활하였고 자주 아이들 넷이 용돈을 보탰다.


이제 대근, 동수, 상열, 희찬 중 아직 직(職)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 희찬뿐이었다.


-칭구들~

잘 지내고 있쩨?

우짜다가 보이 서로 살기가 바빠서 우리 얼굴 본 지가 오래됐다 아이가?

올해 해 바뀌기 전에 우리 얼굴 함 봐야 안 되겠나?

그카고 보이 우리 내년이 환갑이다.-


희찬이 단톡방에 오랜만에 글을 올렸다.

단톡방은 만들어진지 꽤나 오래되었지만 거의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던 무용지물 같은 곳이었다.


... 그래 그리고 보니까 우리 그동안 서로 소원했네.

그래 그리고 보니까 우리 내년이 환갑이네...


셋은 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계절은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들 입에서 다사다난(多事多難), 세모(歲暮)라는 말들이 오갔다.

벽에 붙은 딱 한 장의 달력은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한 잎 남은 낙엽 마냥 올해가 저물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사이로 크리스마스 캐럴이 비집고 다니고 있었고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들은

허리에 작은 등(燈)을 감고 가는 해를 보내며 나이테 하나를 더 그려 넣고 있었다.


올 해의 끝에서 넷이 식당에서 만났다.


희찬은 친구들을 만나러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셋한테 말하였지만 실은 대구지법에 사건도 있고 해서 겸사(兼事)로 왔다.


저녁을 먹고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이미 셋은 꽤나 취해 있었다.

식당테이블에 이미 소주 여섯 병이 뒹굴고 있었다.


상열은 태생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그런 상열을 보고 셋은 자주 농담처럼 말했다.

-상열이 니를 보마(보면) 참으로 안됐데이.

우예(어떻게) 평생을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있노?

내사마(나는) 단 하루도 도 맨 정신으로 사는기 힘들더라.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신 술이 상열을 제외한 셋을 취하게 하였고 말할 때 동수는 혀가 꼬였다.

술집에서 주문한 술이 나오고 네 사람 앞자리에 잔이 채워졌다.

상열은 콜라로 잔을 채웠다.


희찬이 말을 먼저 하였다.

아니다.

희찬이 조금 전 식당에서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식당에서부터 계속 말을 하였다.


대학 때부터 워낙 말하기를 좋아했던 희찬이라 셋은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희찬의 말은 맞는 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말도 있었다.

그는 자주 주관적인 말도 객관적으로 하였고 객관적인 것들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말하였다.


어떤 현상들을 말할 때 그는 늘 맞다, 틀리다는 이분법으로만 말하였다.


오늘 내리는 비를 성가시고 귀찮다고 하였다.

어떤 이가 그래도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단비라 하면 희찬은 그를 몰아세웠다.


그의 말이 편협되고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친구 셋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희찬에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 친구니까 들어줘야 하지....

셋은 똑같이 생각하였지만 실은 셋 모두 그와 맞서기 싫어서였다.


- 느그 서이(셋)는 인자 나이가 환갑인데 벌써 이리 손 놓고 놀마(놀면) 우야노?

희찬이 살짝 꼬인 혀로 앞에 놓인 술잔에 눈을 두고 말했다.

미간(眉間)에 주름이 깊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동수와 대근은 식당에서 마신 술의 취기가 자꾸 올라 희찬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맨 정신인 상열은 희찬의 말에 신경이 쓰이고 거슬렸다.


사실 대근과 동수, 상열은 자주 만나서 함께 식사도 하고 주말에 가까운 산으로 등반도 하고 야구직관도 하고 있었다.

셋의 모임에 희찬은 늘 함께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대구에서 먼 서울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희찬의 독선적인 말과 행동 때문이 더 컸다.


희찬은 그가 법복을 벗었을 때 무렵부터 말이 강해지고 행동이 편협해져 갔다.

셋의 충고는 희찬에게는 그저 늙은 소 옆에서 울어대는 수탉의 울음소리였다.

듣지 않았다.


넷이 만든 단톡방에도 올리지 말아야 할 정치 유튜브를 올리고 자신의 종교를 올렸다.


상열이 두어 번 이런 내용은 부담스럽다고 말하였지만 들은 희찬은 늙은 소였고 말한 상열과 둘은 옆에서 우는 장탉이었다.


이후부터 이들 넷의 단톡은 입산이 통제된 산(山)의 꼭대기처럼 사람의 출입이 없어졌고 그때쯤부터 이들 사이에 살가운 대화가 없어져 갔다.


-내사마(나는)내 나이 열아홉에 취직해가 오십여덟이 될 때까지 죽어라 일만 했으끼네 인자(이제)는 쉴란다.


희찬을 쳐다보며 말한 대근의 눈에는 힘이 없었고 혀가 꼬여 말도 꼬였다.


-난도 느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아부지 따라 호미로 밭을 갈고 삽으로 논에 물댄다꼬 내 청춘 다 가고 내 육신이 다 골병이 들었다 아이가.

인자는 누가 내를 때리 쥑인다 캐도 나는 삽 들고 호미 들고는 안할끼다.


동수가 희찬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


-상열이 니 생각도 야들(얘들)하고 같나?

희찬이 상열을 노려보듯 말했다.


-그래.

나는 요새도 자주 내가 신입사원 때 고생했던 그 장면이 꿈으로 나온다.

악몽 중에 악몽인기라.

다시 가라하마 나는 못 간다.


상열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느그는 그래 생각하마 안된데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안 늙는다.

그래야 건강도 챙길 수 있고 또 부수입으로 돈도 벌 수 있는기라.

이런거를 일석이조라카고 일거양득이라 안카나?


희찬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도(나도)어떤때는 지금하고 있는 일을 딱 때리치아뿌고 식구들하고 해외로 놀러나 댕기고(다니고) 마누라 하고 온천이나 댕기면 좋을낀데 나는 아직은 아이라고(아니라고)생각한다.


희찬의 말을 점점 빨라지고 탁해졌다.

동수와 대근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고 상열은 희찬의 입을 쳐다보았다.


-느그도 알다시피 지금이 백세시대 아이가?

아직 느그가 살아야 할 세월이 40년인데 벌써 놀아가 앞으로 들어갈 돈 감당을 우예 할라카노?


희찬이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강의를 하는 강사와 같았고 듣는 셋은 학생 같았다.


-희찬아

우리 오랜만에 만나가(만나서) 옛날 이야기 하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마 안되겠나?

내사마(나는)그런 이야기 들으마 골치가 아파 죽겠다.


듣다 못한 동수가 젖혀진 고개를 바로 하고 희찬을 보며 말했다.


동수의 말은 희찬에게는 말참견이었다.


-특히나 동수 니는 그런 생각을 하면 도 안되는기라.

니 느그 아부지 짚신을 벌써 이자뿟나(잊어버렸느냐)?


기어이 희찬이 동수의 선(線)을 넘었다.

동수 평생의 아픔이었고 핸디캡을 희찬이 친구들의 조기퇴직을 만류하는 하찮은 말에 써버렸다.


대근이 뒤로 젖혀진 고개를 앞으로 하면서 희찬을 노려 보았다.

상열은 동수의 눈을 보았다.


동수의 눈에서 살짝의 노기(怒氣)가 느껴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상열이 에둘러 오늘 모임을 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아까부터 자꾸 설사가 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희찬과 대근이 대리운전을 불러 자리를 떴다.

동수는 마침 상열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상열의 차에 동승하였다.


-동수 니 괴안나(괜찮으냐)?


상열이 안전띠를 매면서 동수에게 물었다.


-내가 와(왜)?


동수도 안전띠를 하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상열의 물음에 답하였다.


-아까 희찬이 말

느그 아부지 짚신이 어떻고 하는.................


상열의 말에 동수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 어렸을 적 우리 아부지가 짚신을 신고 댕기실 때 마을 사람들이 아부지를 보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어린 내가 마음의 상처를 마이(많이)입었다 아이가.

인자는(이제는) 이자뿟는데 희찬이 저기(저것이) 또 내 아픔을 건드렸네.


상열이 동수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사마(나는) 아까 희찬이가 그칼 때(그렇게 말했을 때)쪼매(조금) 쫄았다(마음 졸였다) 아이가.

니하고 희찬이 하고 한판 확 붙는 줄 알고.


-내가 알라(어린아이)가?

이 나이에 싸우게?


동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 넘겼다.

그런데 내 같았으마 아마 확 붙었을끼라.

그나저나 동수 니 농촌에 묻혀 살더니 인자(이제) 도인(道人) 돠 됐네.

하하하.........


상열이 시답잖게 웃으며 동수의 어깨를 툭 쳤다.


10여 분간 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상열아


동수가 일순간 차의 적막을 깼다.


상열이 고개를 돌려 동수를 보았다.


-있다 아이가

진정한 검객은 같은 검객을 만났을 때 검(劍)을 뽑는기라.

아무에게나 칼을 뽑아서 휘두르는 사람을 진정한 검객이라 할 수는 없다 아이가?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고 빨래판이라고 하는 무지렁이한테 불법(佛法)을 설(說)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노?

일하면서 늙어가는 인생도 존중해 주고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다가 나이 들어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늙어가는 인생도 존중해 줄줄 아는 진정한 토론자와 함께 하였을 때 우리 씹은 소주 한잔 하자.


상열은 자신의 옆에 희찬이 같은 강하고 탁한 친구가 있다는 불편한 사실보다 동수같이 생각이 깊고 마음공부가 잘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훨씬 다행으로 여겨졌다.


세모의 밤은 더 깊어가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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