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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Dec 14. 2023

내 최초의 꿈은 택시기사였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를 누비고 다녔던 택시가 하필 신코로나 택시였다.

生父는 매 순간 멋을 추구하셨다.

순간순간 그것을 놓기도 하셨지만 당신이 의식을 하실 때면 이내 멋의 자락을 잡고 그것을  따라가셨다.


생부는 6.25 사변 때 참전하였다가 머리와 배, 옆구리에 총을 맞으셨다.

머리와 옆구리에는 유탄 파편에 맞으셨고 배는 총알을 직격으로 맞았다.

그때부터 생부는 배에 박힌 총알을 평생 당신의 몸에 지니고 사셨는데 생부가 돌아가시고 한 줌의 흙이 되셨을 때 화장장 직원이 그 총알을 꺼내 자식들에게 보여주었다. 


내 생가 조부님은 8남매 맏이로 태어난 생부에게 결혼 후 바로 도시로 살림을 내어주셨다.

조부는 당신의 장남이 다쳐서 약해진 몸으로는 힘든 농사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 여기셨고 조부님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대구에서 생모와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다친 몸으로는 막노동판에서 조차 불러주지 않자 생부는 로터리에서 두 평 남짓한 가게를 얻어 그곳에서 철물소매상을 하셨다.

말이 좋아 철물 소매상이지 전쟁 후 미군들이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을 주워 파는 잡상인이셨다.


생부는 점심 식사를 하실 때면 우리 5남매 중 그 시간에 당신 눈이 띄는 자식한테 가게를 보게 하고 짧은 시간 끼니를 때우셨다.

그렇게 잠시 얻은 짧은 점심시간에도 생부는 거울을 보며 아침의 모습과 틀려진 곳을 고치려 애쓰셨다.


가게 안에는 미제(美製) 망치, 군용 신발, 싸구려 선글라스 등 미군들이 사용하였던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물건 구석에서 어쩌다 눈이 띈 잡지에는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여자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어도 생부는 억지로 빼았지는 않으셨다.


팔 물건을 구하지 못한 며칠은 난전에서 아주 값싼 옷가지를 팔다가 노점상 단속 파출소순경한테 잡혀가기도 하셨다.


생부는 그런 험한 일을 하시면서도 늘 구두를 신으셨고 그 구두는 해졌지만 늘 반짝거렸다.

늘 단정히 잘린 머리는 수시로 빗으로 빗고 다듬었다.

빗질은 여자인 생모보다 더 자주 하셨다.

 

바지도 정장의 바지는 아니었지만 늘 반듯하게 다림질해서 입으셨고 수시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고 닦으셨다.


일을 잠시 쉴 때에는 자주 거울을 보며 얼굴을 이리보고 저리 보며 다듬고 닦으셨다.


그런 생부를 보고 생모는 자주 우리 5남매한테 그러셨다.

" 느그 아부지는 아무래도 전생에 여자였는갑다.

안글코는 우애 사시사철 기생 오라바이 만치로 저래 민경(거울)앞에 붙어 살꼬? "


입양되어 간 시골에 있었던 나는 시골로 오신 생부를 따라 대구로 간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어느 때쯤 인 것 같다.


시골에서 올라온 나는 또다시 어리바리하며 내 머리를 빠져나가려는 정신줄을 억지로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타고 온 버스에서 내린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파란색으로만 되어 있던 시골버스와는 달리 대구의 버스는 빨강, 파랑, 노란색으로 알록달록 하였고 평생보지 못하였던 스무 대쯤 되어 보이는 택시들이 승강장에 줄을 서서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리바리 한 이유였다.


하늘 한번, 땅 한 번을 보며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고장 난 나침반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나를 생부가 손을 이끌고 한 곳으로 갔다.

택시 승강장이었다.


그곳에는 스무 대가 넘는 똑같이 생긴 택시들이 줄을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아부지가 택시를?????'

하는데 생부께서 한대의 택시 쪽으로 가셔서는 문을 열고 나를 태우셨다.


원래 마음 설레는 일을 할 때에는 마음의 준비와 즐길 준비를 하고 해야 그 설렘이 배가 되는데 내 난생처음의 택시 탑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져 버렸다.


생부와 내가 택시 뒷좌석에 앉자 택시 기사분은 앞에 세워져 있는 미터기를 오른손으로 잡아 꺾으면서 말하였다.

미터기에는 60원의 요금이 찍혔고 미터기를 본 나는 일순간 얼음이 되었다.

"어디 가능교?"


어리바리 해 하는 내 옆에 앉으신 생부가 폼을 재며 대답하셨다.

"동인로터리 가입시다"


내가 시골 국민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 내 어머니가 나에게 사이다 사 먹으라고 주신 돈이 5원이었는데 한번 꺾인 미터기에서 60원이라는 금액이 나온 것을 보고 나는 생부를 한번 쳐다보았다.

'아부지

괜찮습니꺼?'


그때 나는 장동건과 조인성을 한꺼번에 보았다.

미터기를 꺾는 택시 기사분과 폼나게 대답하시는 생부가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생부는 나한테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열이 니

느그 엄마(생모)가 정류장에서 뭐 타고 묻거든 뻐스타고 왔다 캐레이"


생부는 시골에서 자라 어리바리 해져버린 당신의 아들 앞에서 한 번쯤 가오를 세워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멋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구에서의 그날밤

나는 거의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늘 시골마을에서 바퀴에 바람이 빠진 리어카나 늙은 할배와 늙은 소가 끄는 소구루마(수레)를 억지로 얻어 타고 놀았던 내가 일순간에 버스도 아닌 택시를 탔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오늘 탔던 택시의 승차감은 한동안 내 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시 시골마을로 돌아와서 나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내 택시 탑승무용담을 이야기하였다.

"느그 대구 가봤나?

내가 얼마 전에 아부지 따라 대구에 갔다온거 느그 다 알고있제?

그 가보이 아있나?

무신(무슨) 뻐스하고 택시가 백대도 넘게 줄서가 있는데 뻐스는 알록달록하이 우리마실에 왔다갔다 하는 뻐스하고는 완전히 틀리더래이.

아이고 내사마 눈이 휙 디비지더라"


열명이 넘는 아이들 눈이 일순간에 내 입으로 모였다.


"종열이 니 그라마 택시 한번 실제로 만지봤나?"

나와 가장 가까이 앉은 동수가 얼굴을 내 앞으로 더 당기며 물었다.


"야가 지금 뭐라카노?

내가 꼴랑(기껏) 그 택시 한번 만지봤다고 느그들 한테 이카겠나?"

내 눈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라마 설마 니 그 택시 타본거는 아이제?

택시 한번 탈라카믄 엄청나게 비쌀낀데"


동수 바로 옆에 앉은 기선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누고?

탔다 아이가"

눈과 어깨에 아까보다 힘이 더 들어갔다.


"우와~"

열 명의 아이들이 내는 소리가 맞춘 듯 같은 음파로 들렸다.


"택시 뒤에 아부지하고 내하고 딱 타고 문을 탁하고 닫았는데 택시운전수 아재가 매다기(미터기)를 팍 꺾으미 어디 가능교 카대.

그래 우리아부지가 동인로타리 가입시더 카자마자 택시가 출발을 하는데

우와 우리 동네 리아까(리어카)하고 구루마(수레)는 째비도(쨉) 안되더라.

그냥 아스팔트 위에 딱 붙어가 가는데 나는 태어나가 그런 기분 처음이었데이"


친구들한테 한 내 택시이야기는 100퍼센트 순수하지는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순간 택시에 대한 진실에서 내 기분을 마치 사실인양 부풀려서 이야기한 것도 꽤 있었고 친구들은 그런 내 말을 100퍼센트 진실로 알아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택시가 나를 태우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까지 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결심하였다.

나중에 내가 크면 나는 택시기사가 되리라.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택시도 실컷 타보고 또 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쉬는 시간에는 내 시하고 내 아이들도 태워주면 또 얼마나 좋아할까?


오늘 아침에 지하주차장에 있는 차에 타면서 문득 내 어렸을 적 꿈이 생각났다.


지금 내가 타고 가고 있는 내 차가 그때 내가 처음 타보았던 택시보다 훨씬 좋고 고급스러운데 최근 나는 여태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한 번도 설레거나 기분이 좋아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껏 꾸어왔던 내 꿈은 참으로 작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택시기사가 꿈이었고 학창 시절의 나는 교사가 꿈이었다.

이후 나는 내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은행원이 되었고 그 안에서 내 꿈은 수시로 바뀌어갔다.

행원 때는 대리가, 대리 때는 과장이, 과장 때는 차장, 차장이 되고 나서는 지점장이 되는 것이 내 꿈이었고 목표였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었다기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갖기 시작한 생존의 발버둥이었는지 모르겠다.


퇴직하고 지금도 내게 꿈이라는 것이 있을까?

지금에 사 그 꿈은 필요성이라도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나에게 꿈은 있다.

꿈이라기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저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낮겠다.


* 아프지 말자.

* 지금부터 살면서 크게 망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돈 꾸러 다니지 말자.

   그래서 저그 살기도 빠듯한 아이들한테 부담 주고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살자.

* 나와 내 가족이 깜짝 놀랄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 내가 쓰고 있고 다른 작가님들이 쓰고 있는 브런치 방에서 서로 읽어주고 격려해 주고 라이킷 해주면서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다른 작가님들의 삶을 보고 들으면서 살아가자.

* 살다가 나중에 내가 떠나야 할 때가 왔을 때 한 톨의 미련도, 후회도 없이 '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

   잘 놀다 갑니다 '하며 훨훨 웃으면서 떠날 수 있게 지금부터 잘 살자.

  


살아가면서 내 꿈이 변해왔다.

내가 익어가면서 내 꿈도 익어간다.


택시기사에서 무탈을 기원하는 내 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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