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씨 쓰기, 밥 먹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한다. 어머니는 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나를 신동(神童)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저 내가 남인수, 이미자 선생님 노래 몇 소절 흥얼거리고 몇몇 특이한 동네 아지매들 흉내를 잘 낸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하신 어머니는 나를 일순간 신동의 반열에 올려놓으셨단다.
그때 또래 내 친구들 대부분도 고만고만하게 나와 같이 무너진 사랑탑,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지만 내 어머니는 그 아이들 소리는 듣지 않고 그저 내가 부르는 노래, 내가 내는 몇 가지의 흉내에만 당신의 귀를 여셨는 모양이었다.
고슴도치 엄마셨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 진짜 능력의 유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머니의 손에 의해 일방적으로 신동의 반열에 들었던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어느 순간
어머니는 나를 신동은커녕 " 야가 어디 쪼매 모지레나( 모자라나)? " 라고 생각까지 하셨단다.
나에게 숟가락, 젓가락 사용법을 가르치시던 어머니는 일순간 신동의 자리에 있던 나를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아이로까지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손에 쥐어준 숟가락을 이내 떨어뜨리고 젓가락 두 개로는 도무지 수평을 맞추지 못하는 나를 보시고 곧 괜찮아지겠지 하였다가 이거 큰일이다로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거의 한 달간 나한테 숟가락, 젓가락 강의를 하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걱정된 표정으로 마을 빨래터에서 동네 아지매들한테 내 이야기를 하셨단다.
" 거창 아지매~
그 집아 동준이는 숟가락질 잘 하능교? "
거창댁 큰 아들 동준이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 하이고 말도 마이소.
몇 번이나 갈치도(가르쳐도)안되가 내가 뚜드리 패가(두들겨 패서) 억지로 가르칫다 아잉교.
인자는(이제는) 잘 하니더 "
친구 어머니는 내 어머니께 처음에는 잘 안되었지만 엄히 가르치니까 지금은 잘하고 있다고 하셨다.
" 우야꼬?
우리 열이는 암만 갈치도 안되니더.
자꾸 숟가락을 널짜뿌고( 떨어뜨려 버리고 ) 젓가락은 아예 올케 들지도 몬합니더.
우야믄 좋은교? "
부러움 반 시기심 반의 어머니가 친구어머니한테 하소연하셨다.
얼마지 않아 친구 어머니는 내 어머니 요청으로 내가 숟가락, 젓가락을 쓰는 것을 보시려 일부러 우리 집에 오기도 하셨다.
" 언하 띠기요 ( 우리 어머니 택호가 언하댁이셨다 )
내가 인자 쟈 숟가락질하는 거 자시(자세히)보이끼네 쟈는 왼재기(왼손잡이)인갑심더."
친구 어머니 辯은 나를 관찰해 본 결과 내가 왼손잡이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머니가 오른손에 쥐어주신 숟가락, 젓가락을 자꾸 왼손으로 바꾸어 들려고 한 것을 친구 어머니가 정확히 catch 하신 것이었다.
지금이야 왼손잡이가 뭐 그리 귀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좀처럼 왼손잡이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왼손잡이 수가 무엇이 달랐겠는가 만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왼손을 쓰는 것을 어른들이 허용하지 않고 고쳐 쓰게 만들었다.
왼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낫질을 하면 우선 보기가 어색하였고 또 거의 모든 생활기구들이 오른손 위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辯은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면 복이 달아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그때부터 내 어머니는 그나마 내가 왼손으로라도 숟가락을 잘 사용하고 젓가락의 수평을 맞추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을 하셨는지, 그런 내가 기특하다 여기셨는지 나를 영재의 반열에 두지는 않으셨지만 최소한 지능이 모자라는 아이로는 보지 않으셨다.
내가 왼손으로 밥을 먹고 아이들과 구슬치기, 딱지놀이, 공기놀이를 할 때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하여도 나를 나무라거나 만류하지도 않으셨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한 왼손잡이로 성장을 하였다.
친구들과 나무작대기로 칼싸움을 하거나 소풀을 뜯어러 낫질을 하거나 새총을 쏘거나 하는 모든 것을 오른손 대신 왼손이 하였다.
- 왼손에 낫을 들고 풀을 베었던 나는 정확히 풀을 베었다기보다 뜯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나마 내가 정상아여서 다행이었고 나는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왼손을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 왼손의 전성기였다.
전부 오른손을 쓰는 마을 또래 중에 나는 역린(逆鱗)이었고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째비(왼손잡이 발음을 세게 하여 나온 말 같다)라고 불렀고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학교에서 난생처음 연필을 들었다.
ㄱ ㄴ ㄷ ㄹ...... 을 공책 네모란에 써넣는 국어시간에 기어이 내 왼손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내가 왼손으로 연필을 잡은 것을 선생님이 보신 것이었다.
교실에 줄이 잘 맞춰진 책상에 앉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칠판에 써놓으신 ㄱㄴㄷㄹ ㆍㆍ을 따라 쓰고 있는 것을 뒷짐을 지고 책상사이로 걸어가며 보시던 선생님이 내 옆에서 딱 멈추어 서셨다.
" 야가 와이카노 ?"
선생님은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마치 오뉴월 지붕처마에서 고드름을 본 표정이셨다.
지금이야 선생님과 학생들이 격의 없이 대화하고 어떤 때는 친구처럼 지내지만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나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어렵고 어쩌면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 선생님이 나를 보면서 짓는 의아하고 놀란 표정에 나는 더 놀랐고 그만 울고 말았다
" 야가 와 우노?
니 왼재기(왼손잡이)인거 느그 어무이도 알고 계시나? "
대답 대신 더 크게 울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1학기 때
우리 집에 가정방문을 오신 선생님이 나와 어머니를 앞에 앉히고 어머니께 내가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청소 때 빗자루를 왼손으로 잡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알고 계셨느냐 물으셨다.
알고 있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 들어갔고 나는 괜스레 왼손으로 눈 밑 방바닥을 쓸고 있었다.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에서 큰 난리가 나고 말았다.
어머니와 선생님이 하시던 대화를 마실 가셨다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들으신 것이었다.
" 애미하고 열이 느그 둘 다 여기 들온나 보자 "
사랑방에서 하신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마당 감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놀라 날아가 버렸다.
" 아가(이 아이가) 아무것도 모리고 왼손으로 밥을 묵고 글씨를 쓰마 어미인 니가 딱 불러가 갈치야지 우리 집에 왼재기가 무신 일이고 "
할배의 꾸지람은 추상과도 같았고 어머니는 어떻게 던 고치겠다 말씀하셨다.
나는 울지 않는 척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그날 이후 3년간 해왔던 왼손글씨, 왼손밥 먹기를 완전히 바꾸는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왼손잡이 생활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은행에 입행하고 바로 배워야 하는 지폐 세는 것부터가 난항이었다.
선배직원들 100%가 오른손잡이라 나는 돈 세는 법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내게 돈 세는 법을 가르치시던 선배님들 전부가 도저히 헷갈려서 안 되겠다며 포기하셨기 때문이었다.
직장 동회회에서 야구를 하였을 때 나는 또 유별나게 왼손글러브를 사야 했고 탁구대회에서도 왼손으로 라켓을 잡아 상대를 헷갈리게 하였다.
"우와
쟈하고만 하면 헷갈리가 내가 탁구가 안된데이."
나와 탁구를 같이 한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의 탁구시합 후담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왼손잡이의 불편함은 군대에서도 나왔다.
10명이 같은 조로 소총사격을 할 때 사선에 올라갔을 때 다른 전우들은 전부 소총 조준기를 자신의 오른쪽 눈에 맞추어 보고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나는 그들과 정반대로 하였다.
내 심한 왼손잡이는 아예 오른쪽 눈으로 조준기가 맞추어지지 않았고 당연히 오른손으로는 방아쇠를 잡을 수 조차 없었다.
문제는 앉아 쏴, 서서 쏴는 괜찮은데 엎드려 쏴를 할 때였다.
내가 소총의 조준기를 나의 왼쪽 눈에 맞추려면 나는 살짝 오른쪽으로 엎드려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매번 맨 오른쪽 사선에 자리를 배분받아야 했다.
어쩌다 나의 특이점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조교가 나를 중간쯤의 위치에 배분하면 나는 부득이 오른쪽 전우와 다리가 겹쳐야 했다.
마침 그 오른쪽 전우가 나와 동기이거나 후임이면 문제가 없었지만 선임이 내 옆에 배분을 받았을 때 그 사격훈련이 끝나고 나와 내 입대동기들은 그 선임병 앞에서 쪼그려 뛰기를 하면서 복창을 해야만 했다.
후임이 감히 선임의 다리를 건드렸다는 이유에서다.
그 선임병이 선창으로
" 군대에서 고참은~~ "
나와 내 동기들은 복장으로
"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다!!!! "
선임병이 다시
" 고참의 다리는~~ "
우리는 다시
"임금님의 다리다!!!!"
하며 선창과 복창에 맞추어 쪼그려 뛰기를 반복하였다.
그런 일방적인 얼차려가 끝나면 나는 동기들한테 미안한 마음에 괜스레 그들이 들리게 한마디 하였다.
"우리 엄마, 아부지가 나를 이래 낳으씻는데 내보고 우야라꼬?"
동기들은 그런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씩 웃었다.
왼손잡이가 꼭 불편하고 서러운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장점도 있다.
형제, 4촌들과 조상님 산소에 벌초를 할 때 나는 완전히 아웃사이드이다.
낫이 전부 오른손잡이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내게 낫을 쥐어주지 않으며 나는 그저 형제들이 베어놓은 풀들을 옆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때는 편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골프를 할 때부터였는데 지금까지의 불편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불편함들이 함께 하였다.
골프채를 구입할 때부터 왼손채는 많이 없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더라도 구입을 하던지 따로 주문을 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프로에게 레슨을 받을 때도 레슨프로가 왼쪽, 오른쪽을 거꾸로 말을 하던지 내가 거꾸로 알아듣든지 해야 한다.
특히 TV레슨은 내가 빨리 왼쪽, 오른쪽을 거꾸로 알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덕분에 나는 두뇌회전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그 밖에도
연습장에서의 타석도 나는 늘 맨 오른쪽 (or 맨 완쪽)이어야 하고 그나마 그렇게라도 타석이 있으면 나로서는 땡큐다.
스크린골프도 좌타가 없으면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스크린장에서 그들 경기에 갤러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왼손
오른손 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내가 금반지와 시계를 그에게 끼워 주었지만 나는 늘 왼손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래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왼손으로 결재서류에 sign을 하고 시원하게 골프샷을 날리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또 나의 왼손에게 괘변의 소리를 내 질렀다.
" 나의 왼손아~
봐라
미국 대통령도 왼손잡이다. 으하하하하 "
나도 왼손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