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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화 Jul 07. 2022

지팡이에 마음을 주다

                                       지팡이에 마음을 주다

                                                                                                                김 명 화

                                                              


  버스에서 노파가 내렸다. 등이 기역(ㄱ) 자로 고부라져 고개만 앞을 바라보고 있다. 걸음은 곧장 인도와 아파트의 경계인 사철나무 울타리로 향한다. 노인은 그곳에서 무사가 칼을 빼 들 듯 나무 지팡이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세 발이 되어 허리에 힘을 주고 걸어간다.

  며칠 전에 저 할머니가 작대기를 그곳에 꽂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떠났었다. 호기심에 슬그머니 뽑아봤다. 길이는 내 허벅지까지 오고 떡가래보다 조금 더 굵었다. 곧게 뻗지도 못한 것이 한쪽으로 휘어져 있었으나, 끝은 뾰족하고 시커먼 것이 부지깽이 노릇을 해 본 듯하다. 손잡이가 편하게 갈라져 나무 작대기가 아니라 지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며시 있던 자리에 그대로 꽂아두었다.

  작대기는  몇 날을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한번 쓰고 버려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버스정류장 앞, 사철나무 울타리만 지나면 눈이 먼저 힐끔 나무 지팡이를 쳐다본다.

  은행 갔다가 오는 길에 그 할머니를 만났다. 종이상자를 실은 손수레를 밀며 가고 있다. 얼른 다가가 끌어주었다. 손수레를 놓은 손은 옆에 꽂혀 있는 그 지팡이를 뽑아 땅을 두드리며 따라온다. 멀지 않은 곳 처마 밑에는 그동안 모아둔 파지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종이상자를 내려놓고 손수레는 접어 뒤편에 세워두었다. 우리는 사철나무 울타리까지 함께 걸어왔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할머니의 집이 버스 타고 한 정류장이면 간다는 걸 알았다. 지팡이는 왜 이곳에 두냐고 물으니 가져가면 딸이 버린다고 한다. 몇 번이나 버린 것을 다시 주워 와서 이곳에 꽂아두고 폐지를 주우러 갈 때만 쓴다고 했다. 할머니는 또 그 자리에 나무 지팡이를 꽂았다. 꼬부라진 등허리에 뒷짐을 지고 길을 건너가신다. 잠시 후에 버스가 할머니를 태우고 사라졌다.

  그 후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나도록 할머니는 주변에서 사라졌다. 일부러 파지를 모아둔 처마 밑에 가보았다. 누가 치웠는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철나무 사이의 지팡이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며 서 있다.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 사철나무가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날, 지팡이도 손잡이에 눈을 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슬쩍 꺼내어 보니 반들거리던 손잡이는 광택을 잃었다. 지팡이도 나이를 먹는지 삭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떤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냥 지팡이로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매일 한두 번씩 지나다니는 길은 지팡이의 안부를 묻는 길로 바뀐 지 오래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이 사철나무 주변을 청소하고 있다. 한쪽에는 쓰레기를 공터에 모아놓고 태우고 있다. 아저씨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낯익은 듯했다. 놀라서 얼른 버스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사철나무 사이를 바라봤다. 지팡이가 겁에 질린 듯 나무 사이에 꼭 숨어있다. 다행이다.

  또 한 해가 넘어간다. 이제 알록달록한 꽃들도 사라졌다. 머리 위에 해는 무엇에 화가 났는지 이글거리며 다 태워버릴 양으로 불을 뿜고 있다. 모두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숨어버린 시간. 오늘도 가만히 지켜만 본다. 일주일 전에 매달린 매미 유충의 껍데기가 아직 지팡이 손잡이에 매달려있다. 이제는 확실히 할머니가 그동안 오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먼 길을 가신 것인가.

  버스정류장 앞, 할머니 한 분이 내렸다. 힘이 드는지 연신 허리를 두드리며 머리를 심하게 흔든다. 꼬부라진 허리 때문인지 갈지(之) 자로 걷고 있다. 할머니는 두리번거리며 손잡이 될 만한 것을 찾는다.

  얼른 사철나무 사이에 지팡이를 꺼내어 쥐여 준다. “할머니 이거 잡고 가셔요.” 할머니는 지팡이를 연신 땅에 두드리고 벽에도 때려본다. 아마 일신을 거기에 기대도 되나 확인하시는듯하다. 마침내 바닥에 몇 번 탁탁 치시더니 고맙다는 한마디 하시고 꼬부랑 할머니는 길을 간다. 지팡이도 새 주인을 따라 길을 간다.

  어쩌면 지팡이는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의 손때가 묻으면 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이, 다시 그를 힘든 길을 걷도록 한 것 같다. 오지랖이 넓은 것은 아닌지 잠시 후회를 해본다. 더 이상 비 맞고 눈 맞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새로운 주인과 좋은 만남이 되기를 기도해본다. 나도 모르게 지팡이가 꽂혀있던 자리에 눈길이 멈췄다. 그곳은 작은 구멍이 움푹 파여 있다. 허전한 마음이 오랜 친구를 잃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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