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와 파트라슈가 성당 안에 걸린 그림 앞에서 동사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쏟았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티비에서방영됐던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였다.
마음 한쪽이 깊이 파인 듯한 슬픔은 여러 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울먹울먹 올라왔었다. 어쩌면 네로의 죽음에 기대어 내 설움에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8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엄마마저 일찍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슬픔을 길어 올렸는지도 모르는 일.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안트베르펜에 다녀오기로 한 이유는 영국 작가 위다가 쓴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고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4대 걸작이 그곳 성마리아대성당에 있기 때문이었다. 브뤼셀 중앙역에서 안트베르펜까지는 기차로 40분이면 닿았다.
중앙역에서 이어지는 메인스트리트 양쪽으로 다이아몬드 매장들이 보였다. 안트베르펜은 다이아몬드의 도시라고 불리는 만큼 전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량의 70%가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플랑드르 화가로 영국 왕실의 궁정화가였던 안토니 반 다이크의 동상도 그곳에 있었다.
메인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낮은 건물들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성마리아대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종탑을 이정표 삼아 걸으면 길을 잃을 일도 없을 것이다.
성마리아대성당 앞 광장에는 돌바닥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있었다. 그리고 네로와 파트라슈 뒤로 123m에 이르는 종탑이 있는 성마리아대성당이 보였다. 세계문화유산인 성마리아대성당은 1352년부터 약 200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완성된 벨기에 최대의 고딕 건축물이다. 티켓을 구매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십자가 형태의깊고 긴성당 안으로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루벤스의 4대 걸작인 <십자가를 세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부활>, <성모승천>을 하나하나 찾았다.그리고 네로가 마지막에 보았던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앞에 섰다. 창백하고 푸른빛이 도는 예수의 몸.이작품 앞에서 네로와 파트라슈는짧은 생을 마감한다. 내 두 발이 딛고 선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지금도 작품을 보기 위해 성당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의 시대배경인 19세기에도 그림을 보려면돈이 필요했다. 네로는동전 한 닢이 없어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세움>, <그리스도의 부활>, <성모승천>
성당을 나와 안트베르펜 시청사를 지나 인근에 있는 루벤스의 집을 찾아갔으나 리뉴얼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메인스트리트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거리는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점심을 먹고 안트베르펜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 중 하나인 안트베르펜 중앙역을 그제야 자세히 살펴보았다. 네오바로크 양식의 역사는 명성 그대로 아름다웠다.
네오바로크양식인 안트베르펜 중앙역
브뤼셀로 돌아가기 위해 역에 게시된 시간표와 플랫폼을 확인하고 기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도착할 시간이 되어도 기차는 들어오지 않았다. 연착이 되나 싶어 좀 더 기다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안내방송을 놓쳤나 싶어 옆에 있던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본인들도 기차가 오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게 아닌가.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싶어 터미널 인포를 찾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취객이 무단으로 선로를 건너다 사망사고가 발생해 브뤼셀 방향의 모든 기차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어쩌면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이벤트가 생기는 건지.
직행이 모두 취소되었으니 다른 역을 경유해서 가는 방법을 일일이 종이에 적어 주고 있었다. 적어 준 경로를 따라 환승을거듭하며 힘들게브뤼셀로 돌아왔다.
오른쪽 쪽지에 환승해야 하는 두 개의 역이 쓰여 있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로 가는 길에 <오줌 누는 소년상>을 먼저 찾았다. 한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소년은 바르셀로나 FC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소년상 앞은 관광객들로북적였다.
세계문화유산인 그랑플라스는 시청사와 박물관, 길드하우스 등으로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커다란 무대와도 같아 보였다.
광장을 빠져나와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오줌 누는 소녀상>도찾아 보았다. 소녀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담은 무지개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길었던 하루의 끝으로홍합 맛집으로 평점이 높은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벨기에 하면 수도원 맥주가 유명하지만 맥주투어까지는 무리고 아쉬운 대로 저녁을 먹으면서 레페를 주문했다. 시즌 맥주인베리가 들어간 레페도 주문했는데입안을 채우는 풍미에서 부드러운 목 넘김까지 뜻밖에흡족한 맛이었다. 플레이버 맥주를 선호하지 않지만간혹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만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무수한 변수를 경험하다 보면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갑자기 취소된 기차 편 때문에 환승하는 기차마다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음에도 불평하는 사람이한 명도없었던것도퍽인상적이었다.
브뤼셀로 돌아오는 과정이 힘들긴 했지만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고 계획했던 일정을 무사히 마쳤으니이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