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돌아가야 할 시간. 헬싱키

핀란드-60대 부부 여행기

by 나무

*2024.06.12.(수)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이 여행의 맛을 한층 감칠맛 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파리의 아베쎄역에서 몽마르트르 언덕을 향해 걸으며 영화 <아멜리에>를, 팡테옹 옆 골목길에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떠올렸다. 그 내밀한 교감에 지긋이 미소가 번지곤 했다.

영화 <카모메 식당>

헬싱키 도심에 있는 아카테미넨 서점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영화 <카모메 식당>이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사치에가 미도리를 처음 만났던 서점의 2층 카페, 두 사람 뒤로 아카테미넨 서점의 내부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 서점을 설계한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의 디자인을 더듬는 눈길 위로 영화의 장면들이 차르르 지나갔다.


많은 이들이 헬싱키를 레이오버로 잠깐 들렀다 가면서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듯한 소감을 남기곤 하는데 세계적인 명소가 딱히 없는 도시는 그래서 매력이 없을까.


헬싱키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은 대낮처럼 밝아 있었다. 지난밤 끝내 하늘이 어두워지기는 했던 건지. 창밖을 보다가 문득 핀란드의 겨울이 궁금해졌다. 오전 10시에 해가 떠서 오후 3시면 해가 진다는 북유럽의 겨울. 시야는 어둠에 갇혀 좁아질 테고 어둠이 유발하는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일상. 익숙해졌다고 해도 불안이 녹아있을 듯한 날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임에도 우울, 불면, 폭음 등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양송이와 계란을 넣은 죽으로 따뜻하게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가까운 템펠리아우키오 교회에서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커다란 바위 속을 파내어 만든 교회의 입구는 경주에 있는 천마총 입구와 닮아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와! 하는 작은 탄성이 나왔다. 자연암반을 쳐내고 일부 돌을 쌓아 벽을 올렸는데 기둥 하나 없는 돔 형태의 지붕은 절반 이상이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흡사 콘서트홀인가 했다.


내부에 따뜻한 글귀가 인쇄된 종이를 꽂아 두어 한 장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는데 한국어로 된 것도 있다


깜삐 예배당


목조로 된 외형부터 도드라져 단박에 눈에 띄었다. 디자인 강국다운 자신감이 느껴졌다. 침묵의 교회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이 예배당은 역설적이게도 수많이 사람들이 오가는 헬싱키의 번화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음과 번잡함으로 지칠 때 숨어들어 머물 수 있는 피난처 같은 곳이겠구나, 언뜻 태풍의 눈이 연상됐다.


티켓을 사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너무 조용해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하.. 편안하기보다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기분은 또 뭐람.


깜삐 예배당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 불가)


아카테미넨 서점


천장의 유리창은 책장을 넘기는 형상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한데 핀란드인들이 자연의 빛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자연의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데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졌다. 앞서 언급한 바로 그 서점이다.


아카테미넨 서점


카페 파체르


서점 앞 길을 따라 에스플라다니아 공원이 이어졌다. 공원을 끼고 조금만 걸으면 120년이 넘은 초콜릿 카페 파체르와 만난다. 카페 파체르에서 유명한 부다페스트 케잌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는 얘기.


길 오른쪽이 에스플라다니아 공원
왼쪽 쇼케이스에 있는 부다페스트 케잌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카페 파체르/ 이렇게 주문하니 한화로 약 57,000원이 나왔다

헬싱키 대성당


헬싱키에 잠깐이라도 들른다면 대부분 헬싱키 대성당으로 먼저 달려가지 않을까. 헬싱키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백색 외관과 옥색의 돔, 코린트식 기둥이 조화를 이뤄 웅장하면서도 우아함이 느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외부와는 달리 검소함을 강조하는 루터교답게 딱 필요한 것만 있는 듯 간결하고 소박했다.


헬싱키 대성당

헬싱키 대성당 앞에 서면 세나테 광장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광장 중심에는 핀란드에 많은 자치권을 부여했던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서 있었다. 주변 강대국이었던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국이다시피 했던 핀란드는 오래도록 공국으로 있다가 1917년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헬싱키 대성당과 이어진 세나테 광장. 광장 가운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보인다

세나테 광장에서 우스펜스키 성당으로 가는 길은 헬싱키의 주요 건물들과 브랜드 매장들이 모여 있는 알렉산테린 거리를 지난다. 레트로한 초록색 트램만 보다가 '반짝' 하고 빨간색 트램이 나타났는데 파란 하늘을 경유해 오고 있는 듯한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알렉산테린 거리


우스펜스키 대성당


러시아 정교회인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발트해를 바라보며 암반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살짝 녹아내린 듯한 지붕이 퍽 인상적이었는데(참고로 필자는 민초파) 헬싱키 대성당과 템펠리아우키오 교회의 지붕색과 동류의 색이었다.


빈 공간을 두지 않는 정교회답게 화려한 이콘과 성물들로 성당의 내부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순례자들은 차례로 이콘에 입을 맞추고 성호를 그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에서 내려오면 발트해로 이어진다. 헬싱키 관람차가 보이는 마켓광장에는 부두를 따라 피쉬마켓이 서 있었다. 아직 성수기가 아닌지 어디를 가든 거리는 한산했다.


발트해와 피쉬마켓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트램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는데 구수한 냄새가 실내에 가득했다. 뭐지? 하고 인덕션 위의 냄비 뚜껑을 열었다가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아침에 만든 죽이 새까맣게 냄비에 눌어붙어 있었다. 인덕션을 켜 놓은 채 외출을 했던 것. 과열된 인덕션은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꺼진 듯했다. 만일 불이 났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하니 끔찍했다.


불은 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인데 그다음 문제는 하나에 수십만 원 하는 이딸라 냄비는 어쩌지 했는데 새카맣게 타서 눌어붙었던 것이 똑 떨어지면서 완벽하게 닦였다. 와우, 무거운 이딸라 냄비들만 있어 투덜거렸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퀄리티 뭡니까. 핀란드 이딸라 칭찬합니다.


뒤처리를 해놓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도 저녁이 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시벨리우스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숙소를 나섰다. 핀란드의 세계적인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를 기리기 위한 시벨리우스 공원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시벨리우스 공원


공원으로 들어서자 자작나무숲이 이어졌다. 숲길을 걷고 있는데 독특한 조형물 두 개가 툭 튀어나왔다.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비와 두상이 경계 없이 서 있었다. 오래도록 터를 지켜 왔을 암반 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기대고 만져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가까이 오라는 듯 곁을 열어 놓고 있었다. 음악이 경계 없이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듯 말이다.


아름다운 계절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공원의 드넓은 호수 위를 느긋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시벨리우스 공원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긴 밤 시간보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창밖은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집을 나선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제는 풀었던 짐을 다시 싸야 할 시간. 내일 오후 비행기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슴 따뜻해지는 일인지.


밤 11시 20분에 바라본 헬싱키의 밤하늘


*2024년 여행기는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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