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국가의 ESG
중국, 싱가포르, 대만, 인도네시아 ESG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
얼마전 싱가포르의 테마섹재단이 미팅 요청을 해왔다. 이 재단은 2018년말 기준 자산총액 250조원에 달하는 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테마섹(Temasek)이 2007년 400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재단이다. 싱가포르의 공익재단은 어떤 경영 전략을 갖고 있을지 기대하며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대화를 나누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현대차정몽구재단과 테마섹재단의 방향성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미래와 혁신에 투자하고, 미래세대 리더를 육성하며, 전 지구적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았다. 공감과 반가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아시아 국가들의 ESG로 이어졌다. 최근 한국의 ESG 열풍을 설명하며 싱가포르에서도 기업들이 ESG에 관심을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싱가포르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ESG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ESG가 유독 한국에서만 과도하게 관심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의 ESG 동향에 대해 조사해봤다.
우선 중국 정부는 2018년 ‘상장기업 관리규정’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명확하게 제시하며 투자자 관점에서 ESG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이 2020년 9월 UN총회에서 ‘30-60 목표’(2030년까지 탄소배출 정점을 찍은 후 2060년까지 탄소중립)을 제시하면서 ESG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SG와 사회책임(CSR) 보고서를 자발적으로 공시하는 기업도 증가하고 있다. 중국이 상장기업에게 ESG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2020년 1000여개의 A주(상하이, 선전) 상장기업이 ESG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9년의 370여개사에서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자체적인 ESG 평가체계가 있지만 유럽, 미국의 ESG 평가 지표와는 차이가 있다. 중국의 주요 ESG 평가 기관은 화정지수, Havest Fund, 사회가치투자연맹, SynTao Green Finance 등이 있으며 이중 사회가치투자연맹이 평가한 300개사의 점수는 MSCI 평가 점수와 최대 40%까지 차이가 난다.
싱가포르는 2021년 월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그린플랜 2030’을 발표했다. 그린플랜은 ▲녹색정부 ▲자연속의 도시 ▲지속가능한 삶 ▲에너지 재정립 ▲녹색경제 ▲회복력있는 미래 등 6가지 세부 목표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싱가포르의 최우선 정책이자 향후 10년간 싱가포르가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핵심 전략이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부합하여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탈탄소 파트너십을 맺고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기업에 초기자본 6억 달러(약 6700억원)을 투자하고 제3투자자를 모집하여 총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지난 4월 기후정상회의에 참가해 탄소 중립 의지를 표방했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2050년부터 출시되는 신차는 전기 자동차만 허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Indonesia Stock Exchange·IDX)는 2019년 4월 UN주도 지속가능증권거래소 이니셔티브(Sustainable Stock Exchange·SSE)에 동참했다. 특히 IDX는 지속가능한 투자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2020년 12월 거래소 공시를 통해 ‘ESG Leaders ‘라는 새로운 지수(IDXESGL)를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로부터 ESG 관련 높은 평가를 받은 30개 상장기업들의 ESG 점수를 지수화한 것이다. 한국은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만 ESG 공시가 의무화될 전망인데 인도네시아는 이보다 빠를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ESG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높지 않은 편이지만 기업 중심의 지속가능경영을 통해 ESG를 적극 실천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TSMC, AUO, 유안타, 타이완모바일 등 19개 기업이 DJSI 월드지수에 편입되어 있어 한국(17개) 보다 많다. 특히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ESG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100%까지 달성하는 RE100을 선언했으며, 2020년 7월에 대만에서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개발하는 덴마크 기업과 20년 장기 전력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또 같은 해 11월에 친환경 사업자금 조달을 위해 120억 대만 달러 규모의 그린본드를 발행했다. 컴퓨터 기업 Acer는 RE100을 선언하고 2035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 100% 달성을 목표로 세웠다. Acer는 RE100을 선언하기 전부터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기 시작해 2020년 기준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44%에 도달한 상태였다. 제품의 친환경 가치를 제고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Acer는 2020년부터 모든 노트북PC 제품 포장에 재생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포장재뿐 아니라 제품 전체에 재생 또는 친환경 원료를 사용한 제품도 선보였다. 포장재에는 80~85%에 달하는 재생종이를 사용하고, 포장재 위에 인쇄하는 활자·그림에는 친환경 콩기름 잉크를 사용한다. 본체 케이스와 키보드 키캡을 비롯해 속 포장재는 재생플라스틱을 사용하고 편리한 분리수거·재활용을 고려해 표준규격 나사를 채택해 조립·분해 작업 과정을 간소화했다. 제품 수명주기 전반에 친환경 요소를 최대한 적용한 것이다.
아시아 기관 투자자의 인식도 최근 1~2년 새 크게 성장하였다. 각 국가의 연기금은 ESG에 기반한 책임투자를 약속하고 있으며 투자 대상 기업의 ESG 이슈 개선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의 국민연금뿐 아니라 일본의 후생연금펀드(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 홍콩의 금융, 외환을 책임지는 홍콩통화청 등이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때 ESG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상장사로 하여금 지속가능보고서 제출을 요구하는 아시아 지역의 증권거래소가 늘어나면서 상장사의 ESG 수준이 지속적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전 세계 인구 78억 7000만 여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43억 여명이 아시아에 살고 있으며, 주요 수출국 상위 20개국 중 8개국이 아시아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외 경제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은 더는 ESG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글로벌 ESG에 대응할 수 있는 ‘아시안 ESG 가이드라인’(Asian ESG Guideline)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