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부터 연결까지
나는 8월부터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에서 청년 자살예방 서포터즈 모니터링팀 리더로 활동 중이다. 우리 팀은 SNS,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에 있는 자살·자해 관련 유해게시물을 신고하고, 선플을 단다. 수많은 유해 게시물을 볼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트위터에 들어갔다. 온갖 자해사진과 동반자살을 모집한다는 글이 가득했다. ’정말 죽을 사람은 죽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는 흔한 통념을 믿었기에,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모든 인간들을 이해해 보고자 심리학을 전공으로 택한 나였지만, 처음 보는 부류의 사람을 보고 나의 자만심이 무력해졌다. 하지만 나는 리더다. ’ 자살·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느낀 점만 말할 수 없었다. 자살과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고자 논문과 책, 그리고 그들의 게시물을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자해 행동은 단순 주목을 끌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는 한 수단이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내가 화나고 억울할 때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들도 잘못된 방법이지만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맥락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와닿지 않았다. 감정은 그대로인데 이해를 주입하는 것 같아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 우울증 대피소‘라는 커뮤니티에서 ’ 결국에는 희망 줘놓고 모두 다 날 떠나버리겠지 ‘라는 게시글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외로움이 마음으로 와닿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려는 연민의 태도였다. 문득 ‘금쪽같은 내 새끼’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금쪽이의 문제행동을 나무라지만, 결국 금쪽이의 내면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기 전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태도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공자의 사단(四端)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이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 그 마음이 곧 이해의 시작이다.
그들을 이해하며 알게 된 하나의 사실은 그들이 극심한 외로움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외로움, 자해를 이유로 무작정 정신 병동에 가두려는 시도에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그로 인한 자책 등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외로움’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묶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삶이 가장 힘들었고, 살기 싫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외롭지 않게 잘 지낼 것이라는 생각에 비참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나의 힘듦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나의 힘듦을 말할 만큼 가까운 사이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잠에 들곤 했다. 그들이 마주한 단절은 어쩌면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부모님 두 분 다 건강하시고, 착실히 학교생활 중임에도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내가 몹시 불행해 보였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이론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는 인간은 단순히 외로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외로움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을 때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진 ‘단절’이었다.
연민의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졌다면, 이제 다음 단계는 ‘연결’이다. 서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창한 상담이 아니라, 그들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좋든 싫든 여러 인연으로 이어져있다. 즉,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서로에게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다. 거창한 일은 전혀 아니다. 같이 밥을 먹고,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고, 앞으로 어떤 것을 같이 해보면 좋을지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을 때, 마침 연락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 “집 조심히 들어가라”는 연락 하나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거창한 조언도, 상담도 아니었다. 단지 나를 위해 건넨 애정 섞인 한 마디만으로 충분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봉사를 권하고 싶다. 나는 최근 ‘천사 무료 급식소’ 자원봉사에 다녀왔다. 천사 무료 급식소는 독거노인들의 배를 채움과 동시에, 마음의 허기까지 채우는 커뮤니티가 되어주고 있었다. 정부 지원 없이 주 3회 운영되는 이곳에서, 봉사자들은 조용히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는 음식을 나르고, 누군가는 시설의 청결을 유지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100명 가까이 되는 노인들이 모인 혼잡한 공간에서 질서를 유지한다. 그 거대한 흐름 속 나는 내가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느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느끼게 했다. 실제로 정신의학적 용어 중 헬퍼스 하이 (Helper's High)라는 단어가 있다. 남을 도우면서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는 현상이다. 봉사 현장은 세상의 따뜻함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나 자신이 톱니바퀴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장치였다.
나는 나 자신밖에 모른다. 나의 환경에서, 나의 부모와, 나만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나에게 당연한 것은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고, 나에게 경미한 것이 타인에게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봉사를 통해 깨달았다. 나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스트레스 풀려고 먹었던 한 끼가, 어떤 이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한 끼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나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판단할 자격도 없다. 세상은 넓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지만, 결국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외로움의 단절을 끊어내고 다시 연결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거창한 전문지식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작은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 우리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상상 이상으로 서로에게 큰 존재가 될 수 있다. 때론 아무렇지 않게 건넨 안부 인사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 여러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친구이자, 동료, 자식입니다. 서로에게 따뜻한 연결의 끈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바랍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독자 분 중에 홀로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