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와 세계, 사유에서 이론으로

# 2-3

by 더블윤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의 형태는 질서와 대칭, 그리고 명확성이다. 이는 수학적 과학에서 특별히 드러난다."

- 아리스토텔레스


지구의 대기를 밝히고 있는 궤도 일출


고대인들이 과학의 초입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과는 전혀 달랐다. 아직 코스모스를 관측하거나 관찰하는 것에 머물러있었던 그들의 과학은 자연 현상을 지금처럼 법칙과 기제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즉, 그들에게도 과학적 행위는 있었지만, 과학적 자의식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인은 코스모스와 자연을 바라보며 ‘분명한 질서’를 느꼈지만, 그 질서를 신화와 마법의 언어로 해석했다. 번개는 신의 분노였고, 일식은 하늘의 괴물이 삼킨 결과였다. 달력과 농사력은 천체의 움직임을 따르되, 그것은 신의 뜻을 맞추기 위한 제의였으며, 의학조차 주문과 기도로 병을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질서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원인을 탐구하는 사유의 흔적이 분명히 있었고, 바로 그 지점이 과학의 씨앗이 되었다. 신화와 마법에 대한 ‘믿음’의 저변에는 공통된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질서를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은 결국, 과학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진화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 이르러 인간은 신의 손에서 세계를 떼어내어, 이성이라는 도구로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는 과학이 단순한 관찰과 경험의 축적을 넘어, 원리를 밝히고 이론으로 체계화되는 지적 전환점이었다. 세계는 더 이상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질문을 통해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연 이는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 탈레스였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주장하며, 자연 현상을 신화가 아닌 물질적 근원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이 발상은 오늘날의 과학 기준으로는 유치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신화에서 벗어나 세계를 자연법칙의 질서로 이해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자연철학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뒤를 이은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의 기원을 ‘무한한 것(아페이론)’에서 찾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떠 있다는 발상을 제안했다. 그는 최초로 지도를 제작하고, 생명체가 물에서 유래했다는 진화적 발상을 암시하기도 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만물의 원리로 보며, 기체의 희박함과 응축을 통해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려 했다.
이들은 모두 세계의 기원을 신의 뜻이 아닌, 관찰 가능한 자연 원리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과학적 사유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나왔으니 피타고라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1장에서도 언급했듯, 피타고라스는 이 우주를 질서 그 자체로 바라보았고, 그 질서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Philosopher)’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Philosopher’는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며, 피타고라스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스스로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 칭할 만큼 그는 당대의 거의 모든 지식을 두루 익혔다. 어려서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웠고, 부모를 따라 긴 장삿길 여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가 코스모스와 만났던 것은 아마 이집트 유학 시절이었을 것이다.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래에서 공부한 그는, 스승 탈레스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건너가 23년 동안 나일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돌며 멤피스 사제들에게서 기하학과 천문학을 익혔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작스럽게 바빌로니아의 방대한 천문 지식을 접하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피타고라스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약 12년 동안 점성술사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약 60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향 후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또는 피타고라스 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었고, 그들을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키워냈다. 그리고 그 학파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기하학의 핵심 정리인 피타고라스 정리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종교적 색채가 짙었으며, 학문 공동체를 넘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반감을 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학파의 사유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고, 그들의 기여는 단순히 하나의 정리를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피타고라스는 우주론·과학·미학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 이 세계가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정돈된 전체임을 입증하려 했다. 그리고 그 단 하나를 ‘수(數)’라고 보았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사물은 사라져도 수학적 개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 속에서 불변하며, 수학적 지식은 대상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지식이라고 여겼다. 더 나아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정리들이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데서 나오므로,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만물에 수학적 사고를 대입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들은 ‘실재’가 감각적 현상의 바탕에 놓인 ‘수학적 형식’이라고 보았고, 인간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를 통해 실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음악과 화음론에도 조예가 깊었던 피타고라스는 수 이론을 음악에 적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의 신념이 저변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결국 우주로 이어졌다. 피타고라스는 도형과 원운동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우주를 수적으로 조화로운 구조로 여겼고, 마침내 그것을 ‘코스모스’라 부르게 되었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기하학의 핵심이 되었으며, 이후 건축과 음악 이론, 그리고 미학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그 유명한 정리만으로 피타고라스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적 업적은 훨씬 더 근본적인 지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는 ‘수는 단순한 계산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본질을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수학은 현실 세계의 뒤편에 놓인 보다 근원적인 구조를 해석하게 만드는 언어였고, 자연의 질서가 수학적 형식을 따른다는 사실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다시 말해, 피타고라스의 기여는 하나의 정리나 기술적 성취를 넘어, 수학이 자연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우주를 이해하는 언어라는 본질적 통찰을 제시한 데 있었다.

사모스의 피타고라스


수학, 그중에서도 기하학은 언제나 천문학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틀이었다.
플라톤의 제자 에우독소스는 복잡한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심천구설을 고안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별과 행성은 중심이 같은 여러 개의 투명한 구(천구)가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움직인다. 이는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철학적으로 보강되고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체계적인 천동설로 정립되었다.
이 이론을 기반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약 1,500년 동안 서양 천문학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당대 수학적·관측적 사유의 성취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삼각법(삼각형의 변과 각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과)을 발견한 히파르코스는 별의 겉보기 등급을 정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였고, 황도와 백도를 정확히 계산하며 천문학의 기초 구조를 다졌다. 히파르코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식과 월식의 예측이 가능해졌고, 더 나아가 삼각법을 활용하여 지구에서 달과 태양까지의 거리를 추정하기도 했다.
즉, 그는 천문 관측을 수학적 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도구로 삼각법을 발전시킨 인물이었고, 그의 수학적 성취는 곧 천문학이 요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삼각법과 천문학


이 외에도 에라토스테네스는 간단한 기하학적 발상을 통해 지구의 둘레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훗날 지리학과 항해술의 기초를 마련했고, 아르키메데스는 부력 법칙과 기하학적 원리를 세워 물리학과 공학의 토대를 확립했다. 특히 아르키메데스의 사유는 측정 가능한 세계를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의지를 잘 보여주며, 이러한 태도는 이후 갈릴레오와 뉴턴의 과학혁명에까지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코스모스를 수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연을 ‘수’라는 보편적 틀로 표현하고자 한 고대의 독창적 사유였다. 그리고 수학의 논리성과 보편성을 고려해 보면, 수학은 고대 자연철학이 추상적 사유를 넘어 예측 가능한 이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 핵심적인 장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고대 그리스를 인문적 철학과 민주주의의 발상지로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행했던 철학 안에는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신화적 설명에서 벗어나 자연 그 자체의 원리를 탐구하려 했고, 자연을 ‘수’와 ‘기하’로 설명하며, 관찰을 통해 개념과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또한 분류와 인과관계 설명을 통해 자연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대상으로 다루려 했다.
즉,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 이론’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과학 이론’이라 부를 수 있다.

가히 최초의 과학자였던 이들의 사유는 단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정치·교육·예술·의학·건축 등 다양한 문명의 제도와 구조를 형성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피타고라스의 수학 이론을 바탕으로 아치·돔·대칭의 건축미학을 구현했고, 이는 르네상스 건축으로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론은 기독교 신학 체계에 흡수되며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과 대학 시스템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론적 유산들은 수천 년에 걸쳐 재해석·계승되었고, 결국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뉴턴·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과학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시대의 과학과 그들의 사유에 대해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비록 그들의 과학은 현대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고, 여러 이론은 오류로 드러났지만, 그들의 사고는 현대 과학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그들의 사유는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을 가로지르는 과학적 탐구의 길에 첫 불을 밝힌 횃불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과 달의 움직임을 관찰했고, 그 조화 속에서 세계의 이치를 찾기 시작했다.
단지 신의 뜻으로 설명되던 자연 현상들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으로 묻기 시작했다. “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자, 세계를 향한 최초의 도전장이었다.
이렇듯 세계에 대해 이유를 묻고 원리를 찾으려는 자세는 곧 과학의 진화를 의미했다. 신화로 설명되던 세계를 논리와 이성으로 해석하려던 그 첫걸음은, 인류가 정신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고, 바로 그 질문의 순간부터 과학에 대한 사고는 변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정적인 진리가 아니라 변화에 민감하며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력 있는 사유 체계라는 점이다.

태초의 인간이 우주를 향한 질문을 던졌고, 그 행위가 인류의 진화를 이끌었던 것처럼, 과학도 변화와 적응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아 온 하나의 ‘지성의 생명체’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과학 역시 진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진화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움을 향해 도약하는 혁신의 반복이었다.

과학은 그렇게 변화를 거듭하며, 시대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적응해 왔다. 때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때로는 문명의 혁신을 견인했다.
그 진화는 생물의 진화처럼 결코 단선적이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길을 찾는 듯 헤매다가도 어느 순간 빛나는 도약을 이루는 것, 그것이 과학의 진화이며 곧 인간 사유의 진화였다.

이렇게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첫 번째 진화의 도약을 이루었다.
그 도약은 단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꾸는 인식론적 전환이었다.
그 결과, 인류 문명은 과학적 사고라는 새로운 도구를 얻게 되었고, 그 사고는 오늘날에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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