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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빠른 속도로 대재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부정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지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지구의 기후는 급격하게 변화하였고, 그 양상은 지난 몇 차례의 대멸종 시기와 매우 닮아 있다. 하지만 이 기후변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이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해마다 지구의 기온과 해수면이 상승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지만, 그러한 소식은 주가가 하락했다는 뉴스나 물가가 폭등했다는 사실보다 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속을 위협하는 이러한 대재앙을 앞에 두고도 이를 재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전 챕터에서 말한 ‘가벼운 양심’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즉, 우리의 의식 자체가 ‘환경윤리’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를 가속하고 있는 것은 결국 기술 그 자체이다. 우리 개개인이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다양한 상품의 소비자이자 사용자라면, 기술은 그것의 생산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이 오늘날 문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대기 중 온실가스는 산업혁명의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축적되어 왔다. 또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한 플라스틱·합성소재 기술은 풍요로운 생활을 가져왔으나, 미세플라스틱과 해양 오염 문제를 통해 수많은 생명체의 서식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여기에 생산성과 수확량 증대를 위해 발전한 농약·화학비료 기술 역시 토양 황폐화와 수질 오염, 곤충 및 야생 생물의 감소를 초래하며 자연의 순환 질서를 약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진보라 부르며 받아들인 기술들 가운데 일부는, 편리함의 대가로 지구 생명의 지속 가능성과 환경윤리의 토대를 잠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기술들을 규제하고 사용을 자제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양심의 사회가 이루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기술없는 세상의 삶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기술 자체가 변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이 과학윤리가 될 수 있다.
과학윤리는 과학의 방향성을 담고 있다. 이는 ‘무엇을 할 수 있나’라는 능력의 영역에서 벗어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책임의 영역에 도달하는 길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기술과 따로 설명하기 어렵다. 과학이 기술이 되고, 기술이 과학이 된다. 그러니 기술의 변화는 과학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학윤리는 과학이라는 활동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작동하고 있다. 일례로 유전자 편집과 같은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유전자 조작이나 악용 가능성 등의 우려를 제기하며 일부 연구를 제약하거나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즉, 오늘날의 과학윤리는 주로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고민은 ‘기술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과학윤리의 초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만 하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
오늘날 행해지는 과학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탐구되는 경향이 있다. 더 가볍고 튼튼한 신소재를 만들기 위해, 더 오래가는 배터리를 위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기술을 위해 과학이라는 학문이 활용된다.
하지만 존재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목적은 달라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해양 생태계 복원을 위한 유전자 편집 기술.
대기 중 탄소 농도 감축을 위한 탄소 포집 기술.
생분해가 가능한 신소재 합성 기술.
위와 같은 기술들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는 분명 기술의 변화라 할 수 있으며, 과학이 ‘존재의 지속과 공존’이라는 코스모스적 윤리를 담게 되었을 때 충분히 향할 수 있는 방향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과학윤리는 “무엇을 먼저 탐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기술을 우리 앞에 선보일 수 있다.
과학에 의해 새롭게 세상에 나온 기술들이 그러한 모습이라면, 소비자인 우리에게 달리 선택권이 있을까?
우리는 자연스럽게 변화된 기술을 소비하고 사용하며, 이 세계를 다시 회복해 나가게 된다.
이렇듯 과학기술은 우리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들어왔지만, 동시에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해 줄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분열시키는 과학기술이라도, 다시 우리를 하나로 이어줄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보고 인식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코스모스를 향한 시선은 과학과 철학의 탄생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의 인간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곳에 시선을 둠으로써 동일한 감각을 공유하며 코스모스를 닮은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
허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명 속의 인간은 하늘을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같은 시선을 둘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빛나고 있다. 우주로 나아가 지구의 모습을 바라본 인간은 다시금 같은 시선을 두어야 할 ‘지구’를 새로이 발견했고, 그곳을 바라보며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다. 우주에서 어떠한 경계도 없는 지구를 바라보며, 이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행성을 지켜내야 할 책임이 이 땅 위의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우주 속에서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모여 사는 하나의 가족 구성원임이 분명했다.
양심의 과학은 이 구성원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선호와 취향만 강화하기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의견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인공지능은 인간의 윤리적 사고와 판단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설계될 수 있다. 과학은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며 복수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무기에게 파괴의 힘 대신 무력화라는 최소한의 힘만 부여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의식을 공유하며 소통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수를 위한 편의뿐 아니라, 소외되는 이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할 수 있는 것 또한 과학이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이 무엇을 하지 않기로, 또는 무엇을 우선하기로 결정하냐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일들이다.
과학이 양심을 갖게 되었을 때, 과학기술의 문명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양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과학이라는 엔진을 단 문명의 배는 다시, 코스모스를 향해 나아간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지구의 지형을 바꾸고, 생태계를 붕괴시키며, 인간의 생명을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는 파괴의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우리를 그 길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과학기술을 통해 이루고 싶은 문명이 어떠한 모습인지 항상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 이루고자 하는 바가 인류의 공존과 조화, 생명의 지속이라는 가치 위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 과학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과학은 인류 전체를 위한 ‘방주’의 엔진이 된다.
파괴가 아닌 회복을 위해,
지배가 아닌 공존을 위해,
확장이 아닌 돌봄을 위해.
이제, 항해는 계속된다.
미래를 담보한 구원의 배가 ‘양심의 과학’이라는 힘찬 엔진과 함께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