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설계 : 양심의 과학(1)

# 3-7(1)

by 더블윤
“The essence of technology is by no means anything technological.”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 마르틴 하이데거


인류역사상 가장 먼 우주를 탐험하고 온 아르테미스 2호의 오리온 우주선과 그 승무원들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으로 돌아와보자. 그는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 나가며, 기존의 가치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는 존재, 곧 완전한 인간인 ‘초인(위버멘쉬)’으로 나아가기를 꿈꿔왔다.
그의 철학이 시사하는 바처럼, 우리는 이제 새로운 윤리적 가치를 세워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더 이상 ‘가벼운 양심’만으로는 이 문명을 온전히 변화시킬 수 없으며, 보다 높은 차원의 윤리적 가치관이 이 땅에 세워져야 한다.
물론 그 가치관에는 각자의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가치들 속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정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가치를 찾는다는 것이 곧 아무 가치나 선택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문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한 기준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가치관을 단정적으로 제시하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세워야 할 코스모스적 윤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그중 하나의 방향으로 ‘양심의 과학’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의 과학’이란 인간의 행위가 만들어낼 결과와 그 영향까지 함께 고려하는 책임의 관점을 포함한 과학기술윤리를 의미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과학기술윤리는 훨씬 중요하다. 문명의 역사는 언제나 과학의 진보와 함께해 왔으며, 그 방향에 따라 사회의 구조와 인간의 삶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해 왔다.
달리 말하면, 문명의 변화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향하는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오랜시간동안 축적해온 보편적이며 정언적 윤리관들을 알고 있다. 이제 이 윤리를 바탕으로 과학의 길을 설계해야 할 차례이다.




과학기술문명


과학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코스모스적 윤리 가치관을 세우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교육만큼이나 문명의 과학기술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돌이켜 본다면, 이는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성과 논리라는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앞서 제시했던 개념인 ‘2차 인지혁명’ 이후 지속되어 온 우리의 밑바탕이 되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우리가 과학기술문명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과학이 설명하고 있고, 내가 보는 것, 만지는 것,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과학과 기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자기도 모르게 과학기술의 신뢰자이자 의존자가 되어간다.
이성과 논리의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중심에서 우리라는 존재와 윤리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데 있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 그때 일어났던 과학혁명은 이성과 논리의 이름으로 신 중심의 세계관을 지워냈다. (사실 신학과 믿음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지워냈다’기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겠다.)
그리고 오늘날 기술과 결합된 과학은 신을 넘어 우리라는 존재까지 지워내려 하고 있다. 이는 극단적인 은유적 표현이지만, 세계와 코스모스를 이해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과학혁명기의 과학과 달리, 오늘날의 과학은 기술과 결합되어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과 이윤 증대를 위해 활용되곤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은유가 현실이 될 가능성도 결코 작지 않다. 몇몇 기업은 종종 존재의 지속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온전히 그 혜택을 누리고 있거나, 누리길 바라는 우리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이를 단순히 1차 산업혁명기의 노동 착취와 연결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그러한 착취와 학대가 비윤리적이라는 것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 가운데, 사실은 우리라는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모습이다.
우리는 아직도 휘발유와 경유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없는 세상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전기 자동차가 세상에 등장했지만, 만들기 쉽고 오랫동안 그 전통을 유지해 온 내연기관을 굳이 버려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여긴다. 게다가 내연기관 차량이 사라진다면, 석유회사들은 뭘 먹고 살라는 말인가!
플라스틱 빨대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카페에서 빨대 없이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는 쓰라고 만든 빨대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에 대해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환경단체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것을 촉구하지만, "그러는 자기들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무슨 헛소리냐"라는 냉소적 반응이 뒤따르기도 한다.




과학이 분열시키는 인간


과학의 발전과 함께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은 그 속의 구성품처럼 취급받기 시작했다. 코스모스를 담아야 할 과학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고, 수단이 된 과학은 문명을 조화로 인도하지 못했다.
과학이 선사한 기술의 달콤함 속에 파묻혀 하루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지식은 무기가 되어 타인을 멸시하는 도구로 쓰이며, 알고리즘의 추천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착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서 혐오와 갈등, 분열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분명 변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 이제 그 변화의 방향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로 향해야 한다.
과학 안에 보편적 인류애가 담겨 있지 않았을때, 그 과학은 결국 사회적 분열과 파괴를 야기시켜 왔다.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우수한 인간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킨다면 더 나은 인류를 만들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우생학’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장애인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이러한 이론이 특정 이념과 결합되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속 가능한 인류와 문명에 대한 가치가 결여된 대표적인 과학기술은 바로 ‘무기’이다. ‘무기’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만큼 오래되었지만, 그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구가 필요 이상으로 강력해졌다는 사실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지금도 과학은 무기라는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 문명을 지원하고 있으며, 동시에 문명은 과학에게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 편의를 가져다주는 과학기술은 어떠할까. 사용자의 선호를 즉각 반영하여 탐색과 선택의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콘텐츠를 선택·배치하는 시스템, 이른바 알고리즘(이는 일반적인 알고리즘의 정의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용된다.)은 편의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입견을 강화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와 같은 콘텐츠 제공 플랫폼에서 한 사용자가 특정 정치 성향의 영상을 몇 차례 시청하게 되면, 이후 추천 목록에는 유사한 관점을 지닌 콘텐츠가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그 결과 다른 시각에 대한 접촉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는 자신의 기존 인식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반대되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배제되면서 인식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이처럼 무너진 인식의 균형은 편향된 사고를 강화시키고, 반대되는 사고나 균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무지한 존재로 판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서로를 향한 비난과 분열로 이어지곤 한다.

이처럼 효율과 편의만을 위해 사용된 과학기술은 인간을 분열시킨다.
혹자는 편의성의 향상도 결국 인간을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 또한 일정 부분에서는 이 이야기에 동의한다. 원형 문손잡이 대신 기다란 형태의 문손잡이를 사용하거나, 계단과 함께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하는 등의 기술은 우리가 미처 배려하지 못했던 이들을 위한 편의를 제공한다.
하지만 진정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나를 위함인지, 아니면 타자와 공동체를 위함인지를 말이다.
그렇게 자문해 본다면, 편의를 위한 과학기술에도 분명히 그 방향과 종류가 나뉘어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