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설계 : 윤리의 사회(2)

# 3-6(2)

by 더블윤


배움의 존재


인간은 배움의 존재이다.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배움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단연, 배움의 인도자는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비양심의 사회가 양심의 사회로 전환되기 위해선 교육과 배움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그 중요성은 아무리 역설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교육의 부재와 인간의 무지는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예시를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의 붕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참여를 기반으로 했지만, 이성적 토론 없이 감정에 휘둘릴 경우 대중 정치로 쉽게 전락할 수 있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다수 시민의 투표로 결정된 사건이었고, 플라톤은 그것을 ‘무지가 진리를 죽인 순간’이라 평했다.
(중략)
아테네의 몰락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미성숙과 교육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은 도시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인류 사유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교육’에 있었다.
그러나 교육이 약화되고, 지도력이 사라지고, 감정이 이성을 앞서기 시작하자, 문명은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할 힘을 잃고 말았다.”

- 《배움의 존재》 중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육과 배움은 개인의 변화를 넘어 문명과 세상의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이러한 학교들이 등장하고,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질문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중세의 일방적 암기 위주 교육에서 능동적 탐구형 교육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고전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였으며, 수사학 훈련을 통해 시민으로서의 발언 능력을 훈련했다.
(중략)
인문주의 교육은 단순 암기가 아니라, “왜?”를 묻는 존재를 길러내는 것이었다. 이 자율적 사고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수학적 천문학, 갈릴레이의 실험물리학,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으로 이어졌다.
교육의 변화가 가져온 놀라운 배움의 기적이었다."

- 《배움의 존재》 중


이처럼 모든 변화의 씨앗은 배움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는 것은 비양심의 사회가 양심의 사회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때의 필요한 배움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육은 항상 변화해 왔다. 고대의 교육은 생존을 위한 기술과 지식의 전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것이고, 신과 왕의 시대에서는 복종의 미덕과 체제와 질서 유지를 위한 교육만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반면, 산업화 시대의 교육은 효율과 규격화된 인재 양성에 그 목적을 두었고, 오늘날의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넘어, 그것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처럼 교육이 변화해온 이유는 결국 그 ‘필요성’에 있다.

변화를 거쳐온 교육은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교육이 먼저이냐, 사회가 먼저이냐는 그다지 중요한 논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현대의 교육이 달라져야만 하는 것은 어쩌면 자명한 사실이며, 그 변화를 위해 오늘날의 교육을 향해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의 대중교육은 다양한 교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국어, 영어, 수학’과 ‘과학/사회 탐구’ 과목에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이 이러한 과목들에 편중되어 있는 현상은 평가 가능성(정량화의 용이성)과 선발의 효율성에 의해 강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즉, 대한민국의 입시 체계가 오늘날 한국의 교육과정을 만들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교육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무엇을 평가할 수 있는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편향된 교육으로 인해 소외되고 있는 과목 중에는 철학과 윤리, 그리고 그 하위 과목인 도덕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요시 여기고 있는 위와같은 과목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입시에 필요한 위와 같은 교과목들은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기본 소양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산업화 구조 속에서 가장 필요로 요구되는 학문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라는 말을 사용한 것처럼, 위와 같은 교과목 중심의 교육은 지나치게 산업 인재 양성을 기준으로 치우쳐져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는 산업사회 속의 노동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사회의 인식을 담고 있다. 즉, 교육은 인간이 아닌 노동자를 길러내고 있다. 그리고 1차 산업혁명 이후 이어진 이러한 대중교육의 패러다임은 4차 산업혁명기인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 노동자를 위한 대중교육을 순종적으로 따라온 우리에게는 자본주의 세상이 만들어낸 가치가 뒤따른다. 노동을 위한 일터와 물질적인 보상이 그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움의 존재가 되었는가?


이 교육 구조와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회 구조는 완전하진 못하더라도 꽤나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최선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보며, 왜 이것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지, 이러한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진정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는 고민해보고 질문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AI 번역기가 언어의 벽을 허물고 있는 오늘날 세상에서, 과연 영어가 철학과 윤리보다 중요한 것일까?”

“이성과 논리의 힘을 충분히 키워주지 못하는 과학 이론의 탐구가 우리의 사고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

“역사 속의 인간을 보지 못하고, 지나온 길에서 성찰하지 못하는 사회 탐구가 우리에게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의 교육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교육을 향해 물음표를 던져봐야 할 것이다.




윤리의 사회


코스모스적 윤리를 각인의 마음속에 새겨놓기 위해선 근본적인 사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 사회의 변화는 역시 교육으로 이루어지며, 교육의 변화 역시 사회 인식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즉, 교육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양심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먼저 우리의 사회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푯대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제안할 푯대는, 당연하게도 철학과 윤리이다.

허나 이는 다른 학문을 향한 배움이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기존의 교육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언어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넓혀줄 것이고, 과학과 수학은 우리의 논리력과 사고력을 지탱해 줄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져야만 한다.


이 시대의 교육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히 노동과 경쟁력을 향한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물질적 가치의 추구 속에서 나와 타자는 분리될 것이고, 환경윤리는 먼 미래의 위기로만 느껴질 것이며, 과학윤리는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만 판단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사회의 인식 구조 속에, 그리고 교육의 핵심 속에 ‘윤리적 방형성’이 새겨져 있다면, 그 결과는 이전과는 달라질 수 있다.


교육이 윤리적 방향성을 품게 된다면 역사를 배우며 성찰을 찾을 것이고, 과학기술을 배우며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그리고 인간, 국가, 인종, 성별, 종교 등 우리를 구분 짓는 모든 경계를 넘어, 그 관계 속에서 옳고 그름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윤리가 말하는 가치는 결코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윤리는 타인과 나, 세계와 나, 자연과 나의 관계를 발견하게 만들고, 이는 반복되는 갈등과 분열, 파괴를 줄이는 근본적인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의 마음속에, 모두의 보편적 가치로 작용해야만 그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


대중교육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교육으로 시행되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그리고 학교를 다니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 온 학문을 배우고 익혀나간다. 그리고 그 배움은 우리의 근본적인 의식을 형성해 나간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중교육은 그렇기에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학교에서 도덕이라는 과목을 배워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를 위한 교육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조화롭고 지속 가능한 문명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화의 재료로 철학과 윤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앞서 개개인의 의식의 변화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언급했지만, 그 말은 일부 정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점을 인지하는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결코 찾아올 수 없다. 우리는 문명의 구성원인 동시에 문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변화를 향한 의지 없이는 문명의 변화 역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성찰을 시작하자.

이 문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의 교육은 우리라는 존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의 교육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조화롭고 아름답게 번영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것은 태고의 인류가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문명을 건설했을 때부터 이어져 온 본능과도 같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손으로 완성시킬 수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성장하기까지, 윤리적 가치를 배우고 익히며 그것을 내면화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혁명이며, 우리가 일으켜야 할 인지혁명이다. 그 혁명은 우리를 코스모스로 인도할 것이다.


이 윤리의 사회는 교육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윤리의 사회는 우리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양심이 살아 숨 쉬는 사회.

그 사회의 일원인 우리.


그 모든 가치를 만들어내는 우리를, 감히 상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