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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태엽 Nov 01. 2024

트루먼 쇼 (1998)

인생의 위안이었던 별빛조차도 거짓이라면

어느 날 내 앞에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라는 조명이 떨어진다면.

인생의 위안이었던 별빛조차도 거짓이라면.


나의 첫 감정은 외로움일 것이다.




시헤이븐에 사는 트루먼 버뱅크의 인생은 조작되었다. 그가 보고 듣고 먹는 모든 것이 기획된 거짓이다. 부모와 아내, 대화를 나누는 친구와 직장 동료마저도 배우. 어릴 적 겪었던 사고 또한 떠남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들어 트루먼을 시헤이븐에 묶어두기 위한 계획된 사건이었다.

기업에 입양된 트루먼은 출생부터 30세인 지금까지 24시간 내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삶을 살았다. 유일하게 트루먼에게 이 세계는 조작되었다고 알려주었던 첫사랑 실비아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쇼에서 퇴장당해 트루먼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트루먼 쇼가 진행되는 시헤이븐 안에서, 진실한 사람. 트루먼은 트루먼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배우로 할당된 역할을 연기하는 이 공간에서 트루먼만이 배역이 아닌 ‘트루먼’이었으니.


블록 쌓듯 만들어진 세상에도 균열이 생겨버린다. 트루먼은 ‘현실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맥락 없이 물건을 설명하고 추천하는 아내, 자신의 머리 위에만 내리는 비, 같은 자리를 맴도는 차와 이웃. 자각하니 끔찍하게 기묘한 삶. 첫사랑이 떠난다고 했던 ‘피지’로 향하려고 하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한 교통수단 모두 트루먼을 묶어두려는 듯 차단된다. 주변인 모두가 트루먼이 이곳을 떠나봤자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그를 설득한다. 나만은 진실되었다 주장하는 친구의 위로조차 할당된 대사일 뿐이다.


야망만 더 있었다면, 진실을 알고자 했다면 떠날 수 있었을 거야.

-트루먼 쇼, 피터 위어


트루먼의 꿈은 마젤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미 대륙은 모두 탐험이 끝났다며 트루먼의 꿈을 훼손했던 것은 그의 삶을 생중계하고픈 인간의 욕망이었다. 떠나고자 하는 트루먼의 앞을 막은 큰 개, 트루먼 때문에 죽은 것처럼 꾸며졌던 아버지의 익사 사건(이후 트루먼은 물 공포증이 생겨 배를 타지 못하는 건 물론, 물길 위를 지나는 다리조차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건 트루먼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성장 서사를 보기 위해 주어진 시련이 아니라 극복하지 못하길 바라는 욕망에서 만들어진, 시헤이븐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잔인한 폭력행위였다.


‘네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할 수 있었을 거야’라는 말이 어떨 때는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보다 인간을 더 큰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한 문장으로 인간의 인생을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떠날 수 있었을 것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진행자 크리스토프는 떠나기 위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요트에 올라탄 트루먼의 주변에 환경 조작 버튼을 이용해 강한 폭풍우를 만들어낸다. 네가 감히 이곳을 떠나려고 하다니. 어디 한번 죽어보라는 듯 잔인한 파도로 배를 뒤집어버린다. 세계가 아끼고 사랑하는 트루먼이라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자유의지를 가진 순간 안락하던 세상은 이면에 숨겨져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그가 가짜 세상을 떠나려고 하자 트루먼에게 걸린 수많은 기대 가치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어댔다. 조작된 세상에서의 삶이란 고귀하고 행복하다는 말은 트루먼이 고분고분 가짜의 룰에 복종할 때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이게 다야? 날 죽여야 할 거다!

-트루먼 쇼, 피터 위어


그러나 트루먼은 살아남았다. 모든 것을 조작해도 트루먼 안의 자유의지만큼은 조작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일생을 다른 인간이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가. 가짜 바다를 가로지른 요트는 진짜 하늘인 줄로만 알았던 돔에 부딪혀 멈춘다. 쿵, 벽에 부딪히는 소리는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알리는 북소리 같았다.

트루먼의 선택의 경계에 선다. 조작된 사랑과 평온에 남을 것인가, 불확실하지만 진실한 바깥으로 떠날 것인가.

돔 내의 삶은 노예와 다름없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당하고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없다. 사랑하고픈 상대를 사랑할 수도 없어 정해준 인간과 결혼해야 한다. 돔의 의지를 벗어나려고 하면 버튼 하나만 누르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한 재난이 일어난다. 이곳은 트루먼의 삶을 중계하면서 트루먼의 의지는 배제하고 배반하는 세상이다.

자유의지와 인간성을 위한 투쟁이 가장 많이 꼽히는 이 이야기의 주제지만, 사실 나는 인간의 외로움이 먼저 떠올랐다. 숨 쉬는 인간도 무생물도 가짜였으니 내가 하는 사랑도 거짓이고, 내가 받은 사랑도 거짓이다. 누군가와 진실된 마음을 나누고픈 욕망을 충족할 방법이 없는 이곳은 유배지나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아는 채로 안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말하는 밀랍인형만이 존재하는 시헤이븐은 천국이 아니라, 무인도였다. 타는 듯한 외로움이 화한 이 삭막한 곳에서의 탈출 욕구가 선착장에만 가도 숨을 쉴 수 없었던 트루먼을 바다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자유롭게 사랑하고픈 외로운 인간, 트루먼은 경계를 넘어갈 준비를 하듯 난간을 밟고 계단으로 걸어간다. 네가 그 문을 넘을 수 있겠냐고 낮잡아보는 크리스토프의 말에 트루먼은 마지막 인사를 남긴다. 성큼 발을 내딛는 문 너머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어둠이다.

새까만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뒷모습. 바깥은 두려워할 것이 많은 불확실의 세계지만 그곳에는 트루먼 이외에도 진실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쇼는 이렇게 끝난다. 트루먼이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도하던 실비아는 옷을 챙겨 계단을 뛰어내려 간다. 가짜 인생은 이렇게 끝이고, 예측할 수 없는 진짜 삶만이 남았다는 듯 영화 속의 관객, 영화 밖의 관객 모두 이제 트루먼의 삶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트루먼의 인생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과연 실비아와 만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영원히 생중계되지 않는다. 이런 자유로운 ‘알 수 없음’에서 관객은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인간은 승리한 경험으로 또 다른 실패를 이겨낼 수 있다. 트루먼이 관객 따위 존재하지 않는 바깥세상에서 시련을 겪는다면 과거 세상과 싸워 이겨낸 이 서사가 단단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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