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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태엽 Oct 31. 2024

이터널 선샤인 (2004)

그러나 구름 뒤의 햇살은 영원히 아름답게 빛난다. 내 사랑 당신도 그렇다

<타이타닉>의 로즈 역할의 케이트 윈슬렛이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 역할을 맡았다는 걸 영화를 몇 번을 봤는데도 몰랐다. 케이트 윈슬렛은 <타이타닉>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귀족 여성 로즈 그 자체였고,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외롭고 충동적이지만 사랑스러운 클레멘타인이었다. 말갛고 똑 부러지는 분위기의 로즈와 엉뚱하고 예민한 분위기의 클레멘타인이라 더 매치가 안 된 걸지도 모르겠다. 정반대 분위기의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역할 뒤에 같은 배우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 실력이 새삼 내 안에서 재조명되었다.


꿈처럼 하얀 하늘과 땅. 영원한 햇살이라는 제목과 다르게 영화 속 날씨는 대부분 몽롱한 꿈처럼 흐리다. 그러나 구름 뒤의 햇살은 영원히 아름답게 빛난다는 걸 누구나 안다.


영화의 시작부터 조엘은 출근을 때려치우고 몬탁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다. 언뜻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바닷가에서 그는 클레멘타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조엘과 같은 '록빌 센터'가 목적지라고 했다. 굉장한 우연으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노래를 불러주지만, 조엘은 그 국민 민요를 모른다.


첫 만남의 설렘을 뒤로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앞서 나온 의미심장한 것들은 모두 복선이었다.

두 사람은 사실 서로라는 존재를 기억에서 지운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누었을 대화들, 알고 있었을 정보였다. 클렘이 조엘을 지우자 조엘은 분노해 자신도 클렘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조엘이 클렘을 지우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이다. 가장 최근의 최악의 기억부터 지워진다. 지워지는 게 '기억'인 탓에 연출의 한계가 없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조엘의 기억에서 희미한 사람의 얼굴은 뭉개져서 나타나고, 방과 방을 넘나들 때 '어디로든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장소가 바뀐다.

그렇게 기억을 옮겨 다니던 조엘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클레멘타인을 떠나보낸다. 점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자 드러난 건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이유가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추억이다. 이 기억만은 지키고 싶다는 말이 결국 튀어나오고야 만다.


"나 충동적인 거 알잖아."
"그래서 널 사랑해."


미웠던 이유마저도 사실은 사랑했던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였다.

슬프고 아팠던 순간은 상대를 미워할 정도로 깊게 박혀버리는데 행복했던 기억은 왜 지났을 때 축소되고야 마는 걸까. 아팠던 기억을 잘 간직해야 나중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방어할 수 있어서일까? 생존본능 같은 걸까?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과연 망각은 축복인가.

조엘과 클렘의 좋았던 기억은 다 망각이라는 먼지에 뒤덮여 퇴색되었다. 뾰족하게 벼려진 아픈 기억만 도드라져 사랑을 터트리겠다는 듯 마음을 찔러댔다. 망각에 가려진 사랑은 그저 아프고 지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소중함을 찾아준 것 또한 망각이다. 기억을 뒤덮은 먼지를 잊어버리니 그 아래 숨어있던 추억은 여전히 싱그럽다.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작업에서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도망간다. 클레멘타인이 등장하는 기억의 맥락에서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동떨어진 기억, 어머니가 목욕을 시켜주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조엘이 도망치는 이유를 모르는 작업자는 조엘의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 지우기 작업을 강제한다. 어머니가 조엘에게 클레멘타인 노래를 불러주던 그 기억까지 지워지게 된다. 도망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렘은 그렇게 첫 번째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제 다 끝나버리니까, 이 순간을 즐기자고 한다. 촛불이 꺼지듯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조엘의 뇌가 아니라 마음이 기억하게 된다.


안녕, 조엘.
사랑해.
몬탁에서 만나.


기억을 지워도 마음에 각인된 이름은 영원히 햇살 아래에서 빛났다.


그렇게 영화의 첫 장면이 탄생한 것이었다. 조엘은 알 수 없는 마음의 기억을 따라 몬탁으로 갔다.

그곳에 클레멘타인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클레멘타인의 기억 속 조엘 또한 사랑해, 클렘. 몬탁에서 만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설렘이 가득했던 두 번째 첫 만남은 '라쿠나'의 직원이 보낸 시술 전 의뢰인들의 녹음파일로 인해 혼란만이 가득해진다.

두 사람은 충동적 몬탁 여행이 아니라 누군가의 파티에 참석했다가 만난 사이였다. 클렘의 기억을 지워서 조엘은 클레멘타인 노래를 알지 못한다. 차창에 서성이던 이상한 남자는 클렘이 기억을 지울 때 그에게 반한 변태 직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갔던 찰스 강 또한 지난 첫 만남에서 갔던 곳이었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가 지저분하게 헤어진 사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시 시작하기 두려워하는 클렘에게 조엘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조엘이 좋아했던 클렘의 충동적인 모습이 조엘에게 남은 듯, 그는 간단하게 "괜찮아요."라고 말해버린다. 이 한 문장으로, 다시 사랑은 시작된다. 재채기처럼 웃음이 터져 나온 두 사람의 눈 맞춤은 길다.


몇 번이고 처음으로 돌아가도 다시 서로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일까. 만남이 운명이라고 해서 해피엔딩까지 운명일 수는 없다는 걸 두 사람은 첫 번째 첫 만남에서 경험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첫 만남은 어떻게 될까. 예정된 폐허로 가게 될 것인가.


일단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추억과 이별하던 조엘이 했던 말처럼,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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