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경주, 카페 '커피플레이스'

휴식을 위한 겨울 경주 여행

by 지태엽

햇살과 바람이 누구의 옷을 먼저 벗기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해가 따갑고 바람은 시린 날이었다. 내 옷을 벗긴 건 둘 중 누구도 아닌 카페의 온기였다.

tempImageBB6Aiv.heic 경주 커피플레이스

가게는 경주 봉황대 바로 맞은편에 있다. 대릉원과 황리단길이 지척에 있어 방문이 용이하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카페를 바라보면 탁 트인 파란 하늘과 가게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맑은 하늘과 상대적으로 어둑해 보이는 카페 창문을 자세히 보면 검은 옷을 입은 바리스타가 손님을 응대하고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있었다.

카페의 회전율은 높은 편이라 주말인데도 대기는 없었다. 아마 사람이 더 많아도 대기가 길 것 같지는 않았다.

tempImageU5ULyU.heic 커피플레이스 메뉴판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바리스타보다 커피 향이 먼저 인사한다. 코를 통해 머릿속까지 훅 파고드는 커피 향은 쌉싸름하고 고소하다. 좁다란 카페에는 작은 테이블 몇 개와 커다란 바 테이블이 있다. 적당한 인간의 소음, 커피를 내리는 기계의 소음, 그리고 적당히 그 소리를 뭉쳐주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tempImage5AmLsS.heic 직원용 라떼, 아메리카노

커피를 좋아하는 만큼 여기 있는 모든 메뉴를 다 맛보고 싶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먼저 직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새로운 카페에 가면 파는 사람이 자신 있는 종목을 먼저 도전하는 게 나의 습관 중 하나다.

나와 일행은 각각 직원용 라떼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직원용 라떼는 말 그대로 직원들이 마시는 레시피대로 라떼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작은 잔에 담긴 라떼를 되도록이면 빠르게 마셔야 한다고 했다. 아메리카노는 원두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일행은 기본 원두를 택했다.

라떼는 맛있었다. 우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커피의 쌉싸름함, 직원이 신경 써 골랐다고 말해준 예쁜 컵과 좋은 노래. 여러 감각이 즐거운 곳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카페의 분위기인데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은 특별했다. 오히려 주변에서 끊임없이 커피 머신 소리가 들리고 직원이 손님을 맞이하고,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갔기 때문에 평온하게 커피를 마시는 내가 그 공간에서 유리된 것 같기도 했다. 직원이 아니라 손님이기에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언제부터인가 카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위해 커피값과 함께 공간대여비를 지불하는 곳이 되었는데 이곳은 다른 목적이 있는 복합공간이 아니라 맛있는 커피 경험을 위해 마련된 카페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장소다.

tempImageX7KnZ1.heic 커피플레이스 책자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 바 테이블에 배치된 연필을 가져다가 구경하던 책자에 기록했다. 오랜만에 잡는 연필로 글자를 적어 내려가며 라떼를 마시니 잔이 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진에서 보듯 직원용 라떼는 크기가 작다. 아쉬움에 한 잔 더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닐라라떼와 티라떼 중에 고민했는데, 티라떼는 카페마다 맛이 달라지는 메뉴 중에 하나라 이곳의 티라떼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아이스 티 라떼를 기다리는 동안 또 어떤 맛을 볼 수 있을지 기대되었다. 기계는 커피를 갈고 직원은 주문을 받고, 손님들은 웅성웅성 떠들었다. 일행은 옆에서 반복되는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널따란 창은 액자처럼 바깥을 보여준다. 카페 안에 앉아 그 창으로 봉황대를 바라보아도 좋다. 이 땅의 역사만큼 오래됐을 높은 흙무덤 위에 두꺼운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박혀 있다. 잎을 벗은 나무는 건조해 보이지만 수백 년의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만큼 계절이 바뀜에 따라 잎이 돋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쪽을 봐도 시야를 방해하는 높은 건물이 없다는 점이 경주의 큰 장점일 테다. 인간은 머리 위에 무언가가 지나다니면 불안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대도시의 마천루 아래 살아가는 인간들은 경주인들보다 정수리가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tempImager8ekGq.heic 티라떼

어느새 직원분이 커피를 가져다주셨다. 티라떼를 휘휘 저어 마셨다. 밀크티와 커피가 섞여 달콤하면서 쌉싸름했다. 머금으면 두 맛이 동시에 올라오고 삼키면 밀크티 향이 진하게 입에 고여 있었다. 커피의 신맛도 조금 남았던 것 같다.

쭉쭉 마시자 일행이 좀 천천히 마시라는 말을 할 정도로 급하게 마시고 있었다. 맛있는 커피와 장소가 주는 편안함이 긍정적인 화학반응을 만들어냈다.

누군가에겐 다른 곳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맛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드물게 평온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간 일상을 견뎌낼 힘을 얻었으니 내겐 여행 중 마신 커피 중 가장 맛있는 커피일 수밖에.

따뜻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유 거품이 필요하듯 좋은 카페 경험에는 맛있는 커피와 분위기라는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필요한 법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두근두근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