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이라는 영원
삶조차도 유통기한이 있어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는 걸 이론으론 알지만 마음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중경삼림, 왕가위
경찰 223은 4월 1일, 이별 통보한 여자친구를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를 기다리며 매일 그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사서 귀가하던 경찰 223은, 결국 돌아오지 않은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4월 30일, 그간 샀던 통조림을 모두 먹어치워버린다.
머릿속에 있던 그와의 추억을 통조림에 옮겨 담아, 먹어서 소화해버리겠다는 듯이. 꾸역꾸역 그 많은 통조림을 다 먹어버린다. 그러나 남는 건 곧장 모두 토해버릴 것만 같은 더부룩함이다. 사랑하는 이는 떠나고 내게만 애틋한 기억의 맛은 내가 사랑하던 이의 맛이라 달콤하지만 뒷맛은 아프기만 할 뿐이다. 공간과 마음을 지배한 상실감 때문에 하지무는 그 많은 통조림을 모두 먹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마음이 비어 있어서.
누구라도 만나 외로움을 달래고 싶지만 하나같이 거절만 남았다. 경찰 233, 하지무는 홀로 술집으로 향한다. 처량하게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지금부터 이 술집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다짐한다. 그때, 한 여자가 들어온다.
한밤을 달리는 시각. 언제 비가 오고 언제 다시 해가 뜰지 몰라 선글라스를 끼고, 우비를 입은 금발의 여자. 마약 딜러 일을 하다가 배신당해 죽음이 지척에 어른거리는…….
술을 잔뜩 마신 두 사람은 호텔에 쉬러 들어간다. 금발의 여자는 선글라스도, 우비도, 구두도 벗지 않은 채-언제라도 일어나 뛰쳐나갈 것처럼- 잔다. 한없이 비밀스러운 그가 편하게 쉬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무는 그 옆을 뜬눈으로 지킨다. 그러다 아침이 성큼 다가오자 험하게 뛰어다녔는지 더러워진 그의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조용히 호텔을 벗어난다.
그리고 폭우가 내리는 새벽, 비를 잔뜩 맞으며 운동장을 달린다. 하늘도 펑펑 울고, 하지무도 온몸으로 울듯이 땀을 흘린다. 누구도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한 하지무는 그간의 기억을 모두 버리듯 운동장에 삐삐를 버려두기로 한다. 뒤도는 순간, 운명처럼 울리는 삐삐 소리.
368입니다.
비밀번호는요?
‘만 년 동안 사랑해’
702호실 친구의 메시지예요
‘생일 축하해요’
중경삼림, 왕가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는 쏟아지고, 늘 원하던 이의 이름은 불러주지 않던 전화 속 안내원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한다. 기다린 적 없는 ‘702호실 친구’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하지무의 얼굴에는 -그도 몰랐지만-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린 메시지를 받은 사람처럼 막을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이런, 만년 동안 간직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1994년 5월 1일에 한 여자가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해 주었다
난 그 말 때문에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 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 왕가위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는 내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에 달려있다. 기억 속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조차 관계없다. 내가 기억하고 싶다고 해서 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이다.
엔딩에서 하지무가 전달받은 건 생일 축하 메시지뿐만 아니라, 유통기한 칸이 비워진 아름다운 ‘순간’이다. 내가 기다린 줄도 몰랐던 것을 안겨 준, 영혼을 건드리는 순간. 절대로 상하지 않을 것처럼, 빗소리와 함께 밀봉된 순간.
하지무는 그 선물을 받아들고, 기꺼이 ‘유통기한은 1만 년’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