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리 유명하고 위대한 작품, 혹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거나 너무나 귀중해서 꽁꽁 감춰 둔 작품, 심지어는 경매 등을 통해 개인이 소장한 작품조차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 자세한 설명과 배경 정보는 어떤가. 수없이 많은 사이트와 SNS를 통해 우리는 그림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명 박물관, 미술관 앞에는 하염없이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컴맹이거나 그림이 담긴 책을 읽지 못하는 문맹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을 ‘직관’하게 하는 예술의 힘, ‘아우라’가 먼 길과 긴 시간을 마다하고 찾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다. 이것뿐만일까? 미술관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각자가 수십, 수백 가지 자기만의 이유를 갖고 작품을 만나러 간다. 이번 장에서는 미술관을 직접 가야 하는 이유 중 대표적인 다섯 가지를 정리해 본다.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웹사이트 혹은 책을 통해 볼 수 있지만 99% 똑같다. 대개 정면에서 그 작품을 잘 드러내게 찍은 사진들이다. 미켈란젤로의 역작 [다비드 상]도 마찬가지다. 앞모습만 볼 수 있다. 부릅뜬 두 눈, 실제보다 크게 강조된 오른손. 물론 이것만으로 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뒷모습이 궁금할 것이다. 잘 생기고 매끈한 엉덩이, 혈관이 고스란히 보이는 종아리, 돌 주머니를 매단 어깨띠. 이런 것들을 미술관에 가면 작품을 빙 돌며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다. [다비드 상]은 무려 5m가 넘는다. 더욱이 밑에는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좌대까지 놓여있다. 원래 이 작품은 성당 높은 곳에 설치하려 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읽으려면 높은 좌대가 필수적이다. 이 역시 미켈란젤로가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 그러나 미술관을 찾지 않고는 좌대는 쉽게 볼 수가 없다. 그 크기와 높이도 실감하기는 더욱 어렵다. 예약해도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만이 오롯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프레스코화는 캔버스가 아닌 벽에 그린 작품이다. 시멘트 같은 하얀 회반죽을 벽에 칠하고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물감은 벽과 하나가 된다. 제작하기에는 기술적으로 어렵지만 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보존될 수 있는 이유다. 이 회반죽을 얼마나 바를까? 바티칸 박물관에는 이 프레스코화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옆으로 다가가면 이 두께를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집에서 웹 상으로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직접 방문하면 실감할 수 있다.
평생 그림을 하나밖에 팔지 못했던 고흐는 화가에게 필수였던 물감 사는 것조차 버거웠다.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쓰고 쪼개고 쪼개서 캔버스와 물감 등 재료를 충당했다. 송금이 늦어지면 유화는 잠시 미루고 스케치만 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난한 화가는 임파스토라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물감을 듬뿍 발랐다. 남들보다 더욱 재료 살 돈이 없어 힘들었다. 급기야 고흐는 그린 작품을 표구상에 맡기지 못하자 직접 액자를 만들어 그림을 넣었다.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궁여지책이었다.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당시 유행했던 금박 액자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들이 화려한 액자에 묻힌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그들은 그림의 테두리에 액자 모양의 수많은 점을 찍어 액자처럼 보이게 했다. 인터넷과 도판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러한 것들을 생략한다. 액자만을 살피는 연구자들이 있을 정도로 액자는 매우 중요하다. 그림을 한결 더 빛낼 수 있는 작품의 연장 선상이다. 그럼에도 박물관, 미술관에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작품의 일부분이다.
러시아 푸시킨 박물관에 전시된 고흐의 작품 [붉은 포도밭]. 고흐의 작품 중 생전에 유일하게 판매됐다. 고흐가 이 액자를 직접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면 이렇게 작품이 담긴 액자까지 같이 볼 기회가 있다.
살아있을 때도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라고 칭송받았던 대예술가. 그랬던 미켈란젤로였기에 아마도 최고급 재료만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다. 그가 영혼이 담긴 물질이라 여겼던 대리석도 순백의 깨끗한 것만 골라 쓰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미켈란젤로 역시 대가(大家)는 아니었다. 비싼 대리석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바르젤로 미술관에 전시된 젊었을 때 작품 [바쿠스]를 보면 상대적으로 값싼 대리석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얼굴과 몸에 상처처럼 검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 미술관에 직접 가면 대리석도 같은 대리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좋은 재료와 나쁜 재료를 가늠해서 작품을 보는 것도 감상의 또 다른 재미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신된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성모자와 롤랭 재상]은 채 1m가 되지 않는다. 작품에는 세 사람과 천사, 베란다에 겨우 2명밖에 없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다가서서 살펴보면, 저 멀리 풍경 속 마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물론 모니터에서 확대해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이 작품이 대단한 것은 작은 캔버스에 티끌같은 점을 찍어 인물들을 표현한 그 세부묘사 때문이다. 세부묘사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에이크의 또 다른 작품은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있다. [아르놀피니 초상화]. [성모자와 롤랭 재상]보다 더 작은 그림이다. 두 사람이 결혼 서약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놀라운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보이는 둥근 거울이다. 손보다 더 작은 거울의 테두리에는 예수의 수난을 담은 10개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심지어 거울 속 창가에는 밖의 건물과 나무까지 묘사되어 있다. 얼마나 작은 붓으로 정성스럽게 그렸을까. 직접 이 그림 앞에 서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아우라다.
이런 작은 그림과 반대로 거대한 그림을 만나보자.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큰 작품은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이다. 거의 10m에 달하는 유화.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거대한 그림을 보며 의아했다. 어떤 역사적인 사실, 혹은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다룬 것일까 고민했다. 쿠르베는 ‘고향에서 열린 한 농부의 장례식’이라고 설명했다. ‘아니 한낱 농부의 장례식을 그려?’, ‘캔버스 낭비 아닌가?’ 그러나 쿠르베는 ‘내가 본 것을 그린 것. 난 예수를 제우스, 천사를 본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사실주의 미술사조의 시작이다. 비슷한 사이즈의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서양미술의 주류는 역사화와 신화, 종교를 담은 작품이다. 인물이 등장하면 꼭 누구나 알 수 있는 위대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이어야 했다. [나폴레옹 대관식] 같은 그림이어야만 관람자는 ‘안심’하고 볼 수 있다. 일개 농부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쿠르베는 회심의 한 방을 날린 것이다. 미술관에 직접 방문한다면 그림의 크기로 쿠르베의 항변이 더욱 가슴에 다가온다.
작품이 꼭 화려하고 정돈된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 내리는 노천에 있을 수 있고 교회 작은 기도실에 걸려 있기도 한다. 원래 만들어질 때 그 자리에 있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수학적 원근법을 발명해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브루넬레스키.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피렌체 두오모의 돔이다. 앞서 기술의 미비로 120년 간이나 지붕없이 방치된 성당에 최신의 과학 기술을 도입해 당시 세계 최대의 돔을 건축했다. 피렌체 광장을 가면 브루넬레스키의 대리석상을 만날 수 있다. 손에 쥔 컴퍼스는 공학자인 그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느 동상과는 달리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 않다. 높은 곳을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바로 그의 일생의 역작 피렌체 돔에 꽂힌다. 이보다 더 완벽한 위치가 있을까? 더할 나위 없는 조각의 전시장소다. 책과 인터넷을 통해서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작품의 이야기다.
두오모 바로 앞 세례당에는 3개의 문이 나 있다. 1401년 피렌체 시는 정문인 동쪽 문 청동 부조를 공모하게 된다. 사실 이때 브루넬레스키가 최종 결선에 오르지만 더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에게 패해 건축의 길에 들어섰다. 최종 당선된 기베르티는 무려 21년 간의 작업 끝에 청동문을 완성했다. 이에 고무된 피렌체 시는 다시 북쪽 문을 의뢰하는데 기베르티는 27년 동안 작업에 매달린다. 그가 제작한 북문의 제막이 있던 날 시민들은 감탄한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이 문을 보고 ‘천국에 문이 있다면 이와 같을 것’이라고 찬사했다. 이때부터 ‘천국의 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 전의 동문보다 훨씬 아름답고 훌륭했기 때문에 결국 이 두 문을 교체한다. 세례당에서 동문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렌체 광장에 가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동문은 바로 피렌체 두오모와 연결되는 곳이다. 세례당에서 깨끗이 정화한 성도들이 나와 두오모로 들어서는 과정에 동문이 있다. 이처럼 어떤 작품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빛나기도 한다.
피렌체 중심부에 위치한 산마르코 수도원은 42개의 독방 기도실이 있다. 시민들이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던 곳이다. 여기에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가 프레스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쉽게 검색해 찾아볼 수 있지만 바로 여기 수도원에서 봐야 진정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정갈한 방안에 덩그러니 놓인 그의 작품들은 기도자가 신과 만날 수 있게끔 하는 위대한 매개체가 된다. 아름다운 미술관과 전시실, 화려한 금장 테두리 액자에 안젤리코의 작품이 들어가 있다면 쉽게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어떤 그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확연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이 차이를 보여주는 책의 그림이라든지, 모니터에서 그림을 확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림을 감상하면서 다가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미술관에 직접 방문하면 고흐의 그림도 직접 눈앞에서 물감 덩어리 임파스토 기법을 체험할 수 있다. 단지 몇 걸음 앞으로, 뒤로 움직이며 대가들이 그린 작품이 주는 마법을 몸소 느끼게 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도 역시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유대인 신부] 보통의 위치에서는 남자의 옷은 화려하게 보인다. 심지어 옷감의 촉감까지 전해오는 것 같다. 껄끄러우면서도 부서질 것 같은 오른팔의 옷감. 그러나 그림 앞으로 다가가면 ‘이게 뭐야?’하고 깜짝 놀랄 수 있다. 도무지 정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물감 덩어리다. 어떻게 이 표현이 거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
런던 내셔널갤러리 르네상스 전시실에 가면 한스 홀바인의 대표작 [대사들]을 만날 수 있다. 엄청난 세부 묘사와 함께 그려진 당대 사물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곱씹어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 발밑에 이상한 하얀 물체가 보인다. 정면에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다. 시선을 옮겨보자. 그림의 오른쪽 끝에 서서 다시 감상해 본다. 그 괴상한 물체는 뜬금없겠지만 해골이다. 예로부터 미술에 등장하는 해골은 죽음과 삶의 유한을 의미한다. 대사들은 자신의 이혼을 성립하기 위해 카톨릭 신앙을 저버린 영국 국왕 헨리 8세를 설득하기 위해 파견됐다. 런던을 방문해 기념사진 찍듯 초상화를 남겼다. 그리고 그 안에 이 상징을 담았다. 아무리 높은 신분과 권력이 있더라도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경고하고 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작품 [해변가의 수도승]. 웅장한 대자연 앞에 선 한없이 작은 인간 존재. 수도승과 같은 위치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와 그림 아래 쭈그리고 앉아 올려다 볼 때 감상자는 또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더 높은 곳에서 이 그림을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당연히 관람자일 테지만 어쩌면 우리가 수도승이 될 수도 있고 이를 내려다보는 신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보는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달라 보일 수 있다.
미술관은 직접 방문한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방문에 앞서 보통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이 미술관에는 어떤 작품이 유명하니 그걸 감상해야겠다. 예상대로 그 작품 앞에 서면서 아우라를 느끼고 다시 염두에 뒀던 작품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어라? 이건 뭐지?’ 하면서 갑자기 내 눈앞에 확 들어오는 작품을 접하게 된다. 미술관을 방문하기 전 살폈던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 작품을 예상치 않게 보게 된다. 뜻밖의 작품이다. 유명하진 않지만 누구에게나 주관적으로 자기한테만 좋은 작품이 있을 수 있다. 미술관에 직접 방문하면 이런 작품을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나 역시도 수없이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베를린 박물관섬에 있는 베를린구국립미술관. 2018년 방문했을 때는 유명한 인상주의 작품은 물론 프리드리히 특별전이 열려 그의 깊이있는 낭만주의 작품을 한껏 감상할 수 있었다. 이후 들어서게 된 아서 캄프(Arthur Kampf, 1864~1950)의 전시실. 내 눈을 의심했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떡 하니 서 있었다. 캄프의 작품, [아티스트]는 1907년에 그려졌으니, 당연히 머큐리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였다. 콧수염과 달라붙는 타이즈, 민소매 셔츠. 아마 프레디 머큐리는 이 그림을 보고 무대 의상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또 한 번은 프랑스 콜마르에 있는 린터운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곳에는 미술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그뤼네발트의 [제단화]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작품 중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바로 그 작품. 프랑스에서도 변방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은 박물관인지라,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 작품 하나만 생각하고 방문한다. 물론 [제단화]에 담긴 그림은 어마어마한 감동이었다. 한참을 그 앞에서 굳어있다 돌아섰다. 그러다 마주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무려 [게르니카]였다. 3개월 간의 유럽미술여행을 계획하면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이 스페인을 일정에 넣느냐였다. 국가들이 다닥다닥 붙은 유럽이지만 유독 스페인은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망설였던 것은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을 가면 피카소의, 아니 20세기 현대미술의 최고라 할 수 있는 [게르니카]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아쉽지만 빠듯한 일정 때문에 뺐던 [게르니카]를 뜻하지 않게 프랑스 변방에서 ‘영접’했다. 물론 이 작품은 피카소가 직접 그린 유화는 아니다. 피카소가 친구 뒤르바흐와 함께 제작한 태피스트리다. 일종의 양탄자로, 밑그림을 바탕으로 실로 수를 놓은 직물 작품이다. 하나하나 피카소의 손길이 닿은 작품은 아닐지언정 그가 구상한 전쟁의 참혹함은 충분히 구현됐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한 도시다. 내전 때 독재자 프랑코의 부탁으로 히틀러가 보낸 폭격기가 민간인을 학살했던 곳이다. [게르니카]가 소장된 콜마르 역시 독일과 프랑스 간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여러 번 그 주인이 바뀐 지역이다. 그런 의미 때문에 린터운덴 박물관의 [게르니카]가 더욱 의미있고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