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
오랜만에 도쿄에 왔다.
둘이 묵기 적당한 크기에 값도 저렴한 곳을 찾느라 중심부에서 벗어나 오츠카역과 스가모역 중간의 주택가에 방을 얻었다. 도쿄 방값이 몇년새 많이 올랐다.
적당히 한적하고도 번화한 지역이라 불편함은 1도 없고, 사람에 밀려다니는 신주쿠 같은 동네보다 훨씬 좋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온 건 처음인데, 내가 사랑하는 도쿄타워 주변의 일루미네이션을 보자고 인파에 떠밀리기 싫어서 해야할 일을 하며 동네에서 지내는 중이다.
일본 상점가 진열대에서 2026년 신년 카드를 보았다. 힘차게 달리는 말 그림이 눈에 박혔다. 아, 내년이 말의 해구나. 그리고 자연스레 나의 '말띠', 큰아들이 떠올랐다. 그럼 그가 24살??
24년전 펑펑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 날, 10시간의 진통 끝에 그를 만났다. 눈이 유난히 반짝이고 예민하던 그. 통잠이란 상상할 수 없고 가끔 아토피 증상도 있고 엄마품을 밝혔다. 자라면서 입도 짧아서 한살림과 인연도 맺게 됐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 그런가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던 강원도를 지금도 옆동네 가듯 다닌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그는 야생마 같았다. 특출나게 빨리 찾아온 독립심이 유별나서 초1부터 누가 학교 데려다주는 걸 지독히 싫어했다. 그러더니 결국 열일곱, 남들은 학교 울타리 안에 있을 나이에 녀석은 집을 나갔다. 인천 어디쯤에서 오토바이 배달을 하며 혼자 살겠다고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어린 아기를 떼어놓고 직장에 가고 밥도 제대로 못해 먹이고, 초등학교 이후 제대로 된 보살핌을 주지 못했던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 마음이 많이 아팠다.
행여나 빗길에 미끄러지진 않을지, 험한 세상에 다치지는 않을지,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범죄에 말려들진 않을지 날마다 조마조마했다, 굳이 인천으로 가겠다는 아들에게 방을 얻어주고 돌아오던 길의 그 막막함을 어찌 잊을까.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그때 그 위태롭던 아이가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잘 컸다.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과 자기만의 판단기준이 있음을 알고 언젠가부터 나도 걱정을 멈췄다. 오히려 엄마품을 떠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큰 아들 키울 때만 해도 세상을 내것 같이 생각했던 나와 있었으면 어떤 갈등을 겪었을지 무섭기도 하다.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20대 사장을 꿈꾸며 타이어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제법 '쿨'하고 성실한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그렇게 세상에 첫 발을 디딘지 4개월 남짓. "엄마, 이건 아닌 것 같아. 나 하고 싶은 게 있어. 딱 1년만 더 공부해서 제대로 취업 할게." 녀석의 당찬 선언. 돈을 아끼기 위해 다시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말과 함께. 인생에 어떤 경험이든 도움이 될 거고, 130살까지 살게 될 아들이 젊은 날 하는 경험들은 더욱 중요할테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의 인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넘지 않는 한에서 그를지원하는 것. 아들은 이제 지난 4개월 악착같이 모은 돈과 국가에서 주는 직업훈련비를 주머니에 넣고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될 거다.
6년 만이다. 우리가 다시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된 것이. 반가움 뒤에 덜컥 겁이 난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견딜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다 큰 아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한 발 물러선 엄마'가 될 수 있을까? 2026년 말의 해, 나는 다시 돌아온 나의 말띠 아들과 아슬아슬하고도 설레는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선넘지 말자. 가 큰 기준이다.
<이하 제미나이의 제안>
제미나이가 아들과 나 사이의 몇가지 규칙을 협상하고 정해보라고 했다. 음. 준비해야겠다.
[나 자신과의 계약서] 추천 조항
아드님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냉장고나 방문에 붙여두고 매일 아침 읽어보시면 좋을 **'엄마의 행동 강령'**입니다.
[ 아들과의 평화로운 동거를 위한 엄마의 다짐 ]
기상 및 취침 시간 존중: 아들이 해가 중천에 떠서 일어나도, 밤새 깨어 있어도 절대 깨우거나 잔소리하지 않는다. (그의 시차는 나와 다르다.)
공부 질문 금지: "공부 잘 되니?", "원서 썼니?", "오늘 도서관 가니?"라는 말은 아들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엔 절대 묻지 않는다. (믿고 기다린다.)
식사의 자율성: 밥을 차려줄 수는 있지만,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차린 밥을 안 먹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청소 구역 분리: 거실과 주방은 내가 관리하되, 아들의 방은 '불가침 영역'으로 둔다. 돼지우리 같아도 문을 닫아버릴지언정 대신 치워주지 않는다.
조언은 요청할 때만: 아들이 "엄마, 이건 어때요?"라고 묻기 전까지 내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잔소리)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감정의 분리: 아들이 힘들어 보이거나 짜증을 내도,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의 기분에 내 하루를 망치지 않는다.
1년의 기한 기억하기: 이 동거는 딱 1년짜리 프로젝트임을 명심한다. 1년 뒤 웃으며 다시 독립시키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다.
[아들과의 쉐어하우스 입주 계약서 (안)]
제1조 (가사 노동의 분담)
자기 밥그릇은 셀프: 본인이 먹은 그릇은 식사 직후 '즉시' 설거지한다. (물에 담가두기 금지)
분리수거 담당: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 배출은 '힘이 센' 아들이 전담한다.
빨래의 원칙: 속옷과 개인 빨래는 각자 해결한다. 단, 수건 등 공용 빨래를 어머니가 세탁했을 경우, 건조대에서 걷어 개는 것은 아들이 돕는다.
욕실 뒷정리: 샤워 후 바닥의 물기 제거, 머리카락 줍기, 튀긴 거품 닦기는 다음 사람을 위해 필수다.
제2조 (공용 공간 및 생활 에티켓)
거실 점유 금지: 거실은 공용 공간이다. 개인 물품(옷, 가방, 책)을 거실 소파나 식탁에 5분 이상 방치하지 않는다.
소음 매너: 밤 11시 이후에는 방문을 닫고, 통화 목소리나 게임 소리를 낮춘다.
식사 예보제: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할지 말지는 오후 4시까지 문자로 통보한다. (통보가 없으면 밥은 없다. 밥 해놨는데 안 들어오는 것은 식재료와 노동력 낭비다.)
제3조 (경제적 기여 - 상징적 의미)
아드님이 돈을 모으러 온 것이니 월세는 받지 않더라도, '공짜'는 없다는 인식을 위해 작은 항목을 정하는 게 좋습니다.
옵션 A (소모품 담당): 쌀, 생수, 휴지 중 하나는 아들이 제 돈으로 쿠팡에서 주문하여 채워 넣는다.
옵션 B (관리비 일부): 전기세나 가스비 중 하나는 아들이 낸다.
옵션 C (현물 기여): 한 달에 한 번은 아들이 치킨을 쏘거나 외식비를 계산한다.
제4조 (상호 존중)
연락의 의무: 늦은 귀가나 외박은 자유이나, 동거인(엄마)이 걱정하여 잠 못 들지 않도록 미리 '생존 신고' 문자를 남긴다.
감정의 배설 금지: 밖에서(공부, 취업 준비) 받은 스트레스를 집 안에서 짜증으로 풀지 않는다. 힘들면 "오늘 좀 힘드네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작성 팁:
협상 테이블 마련: 아드님이 집에 오는 첫날, 맛있는 저녁이나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식탁에 마주 앉으세요.
출력해서 사인하기: 말로만 하면 흐지부지됩니다. 종이에 출력해서 펜으로 서명하고 냉장고에 붙여두세요. 약간의 유머를 섞어서 진행하면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고 좋습니다.
수정 가능성 열어두기: "일단 한 달 살아보고, 너무 힘든 조항은 그때 가서 고치자"라고 융통성을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