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이 지는 삶의 무게
"아빠, 오늘 저녁에 치킨 먹고 싶어."
일곱 살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퇴근길 아파트 상가 1층에 있는 치킨 집에 갔다. 포장을 한 뒤 한 손 가득 묵직한 설렘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불현듯 시골에 계신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농부다.
60년대 농촌 그 힘든 시절, 국민학생이던 아빠는 공부가 그렇게 재밌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항상 1등을 했다고, 본인 피셜이지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또 당시 교회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물론 전도가 목적이었을 테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신한 방법이다- 아빠는 그 영어 수업에 너무 가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일을 도와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집안 형편이었고, 영어 수업 대신 형님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다고 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아빠도 어깨에 멜 수 있는 지게를 굳이 만들어 주셨다는데, 그때 아빠 나이 고작 여덟이었다.
아빠는 한이 맺혔다.
비록 할아버지에 이어 농부로 살아갔지만,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자녀 셋을 도시로 유학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일곱 살 이후로 아빠와 같이 지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대구로 유학을 와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할머니와 누나와 함께 살았다. 강제로 주말부부 아닌 주말부자 주말모자가 되었다.
평일은 대구에서 지내다가 토요일만 되면 할머니 손을 잡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내 고향 내 엄마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갔다. 토, 일 이틀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월요일 새벽에 아빠 차를 타고 대구로 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새벽 5시쯤에는 출발을 했어야 하는데, 부모님과 헤어지기 싫었던 어린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엉엉 울었다. 가기 싫다고 울었다. 그때, 아빠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셨고 엄마는 우는 나를 꼭 끌어안고 같이 우셨다. 그때 내 나이 여덟이었다.
이제 내가 그때의 아빠 나이 정도 되었다.
아빠는 어땠을까. 겨우 여덟 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을 태우고 대구로 오던 그 차 안에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부모와 떨어져서 살기 싫다고 목 놓아 울던 자식을 보며 어떻게 견디셨을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떻게 삼키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