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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Nov 04. 2024

‘임나’ ‘일본부’

1.머리말

이른바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논의가 고대 한일관계사, 한국고대사, 일본고대사에서 각기 다루어져야 할 학술적 연구주제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현실적으로는 학술적 연구보다도 일본사교과서의 서술문제나 한일 양국의 정치적 문제와 같은 비학문적 현안과 맞물리면서 일반적 여론상의 논쟁으로 비화된 바가 적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현실적 문제가 학문적 연구보다 선행된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 한일 양국 간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나 논의가 더 이상 선입관에 의지하거나 감정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이야 말로 서로를 객관적으로 직시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임나일본부를 정확히 이해 하기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정세를 살펴 본 뒤, 임나일본부에서 선행되어야할 '임나'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기존의 연구사적 검토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본문 

1) 4~6세기 한반도와 국제 정세

4세기말부터 5세기 초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심축을 이루었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와 연합하고, 백제를 중심으로 왜와 가야가 연합하여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4세기 전반 이래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크게 받아 성장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4세기 후반에는 동서축의 압박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상당한 기간동안 고구려 병력이 신라 영토에 주둔하여 방패의 역할을 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의 우호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벗어나기 위하여 백제와의 연결을 도모하였다. 백제도 강적인 고구려에 저항하기 위하여 신라와의 적극적인 접근을 모색하였다. 이는 곧 고구려의 고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의 왜는 4세기 후반 백제의 요청에 따라 한반도 남부지역에 출현하여 군사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강적 고구려와 수차례 싸워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5세기 고구려-왜의 관계나 신라-왜의 관계는 4세기의 기조(基調)가 거의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5세기는 말하자면 남하정책을 강하게 추구하던 고구려의 압박에 대항하여 하나의 연합세력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신라가 왜와의 기존 적대관계를 개선하지 못하고 여전히 일관하고 있었던 점은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신라의 상호원조와 백제의 재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크게 퇴조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백제와 가야 사이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구려 세력이 퇴조했다는 사실은 이제 백제에게 임나의 협조가 덜 필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2) ‘임나’에 대해서

임나일본부라고 하면 한 단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임나’ +‘일본부’로 볼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임나와 일본부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임나의 개념에 대한 의견은 예전부터 분분했다. 백제, 신라 영역을 제외한 한반도 남부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설, 임나의 명칭이 유래한 김해 지방의 금관국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 등 몇 가지의 의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것은 임나가 가야의 제국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놓은 연맹체라는 것이다. 가야 지역은 하나의 통합된 세력이 아닌 소국들이 난립되어 있었는데 이를 지배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통합된 세력은 중심 세력만 통제하면 전 지역에 대한 장악이 가능한데에 비해, 분열 되어있는 나라들은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작고 독립성이 있는 나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 소국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놓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묶어 놓은 단위가 바로 ‘임나’인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임나는 EU와 비슷하다. 유럽 지역에 있는 나라를 EU로 묶어 놓듯이, 가야라는 지역에 흩어져 있는 소국들을 임나라는 연맹체를 통하여 묶어놓은 것이다.

이렇게 가야를 연맹체로 묶어 관리하게 되면 왜가 걸린다. 바다 건너 있는 왜를 일일이 상대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백제의 입장에서 가야 제국과 왜까지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었다. 또 복잡한 세부 사항은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떠맡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이유에서 설치된 것이 바로 ‘일본부’이다. 즉 종합해서 보면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임나에 파견된 왜의 대표부라고 볼 수 있다.


3)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최근의 임나 일본부에 대해서 진행되고 있는 대해서는 외교기관설(奧田尙, 鬼頭靑明, 金泰植), 교역기관설(李丙燾, 吉田晶, 金泰植, 李根雨),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합의체설 및 외교 교섭단체설(鈴木靖民, 吉田晶, 大山誠一, 鄭敏洙), 외교교섭을 목적으로 하는 사신·관인설(請田正幸, 山尾幸久, 鈴木英夫, 李永植)이 있다. 이들의 내용은 하나하나 다르지만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중심으로 비슷한 성격끼리 모아둔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 설 중에 먼저외교기관설을 살펴보면임나일본부를 가야제국이나 백제, 왜가 대왜 외교를 위해 설치한 외교기관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규명함에 있어서 왜 왕권중심이거나 백제중심, 혹은 가야제국 중심이라는 일국의 입장만을 중시해온 종래의 제설의 관점과는 달리, 백제·가야제국·왜라는 삼자의 상호관련성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다.

교역기관설은 운영주체를 야마토정권이나 백제로 보는 등의 관점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정치·군사적 성격을 배제한 순수한 경제목적의 교역기관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합의체설 및 외교교섭 단체설은 군사·외교·무역에서 가야제국의 상급호족과 왜 왕권에서 파악한 부경(府卿)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요사항을 논의하고, 합의하는 장이 그 실태라고 이해했다.

외교교섭을 목적으로 하는 사신·관인 집단설로 이는 왜왕권이 보낸 사신이나, 관인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들은 주로 가야제국을 위한 외교에 종사하고 있는 집단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임나일본부의 성격으로 분류한 것과 달리 일본부의 위치나 성립시기 및 존속기간, 일본부의 구성 혹은 조직, 파견·운영주체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3.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당시의 정세와 '임나'와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최근 한일 학계의 연구결과는 가야제국과 왜왕권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왜의 가야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정벌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체의 군사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순수교역, 외교교섭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를 포함한 임나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야와 왜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고 백제의 관여·관련을 중시하려는 시점이다.

하지만 아직 일본부의 설치 및 파견 또는 운영주체의 문제, 임나일본부의 기원의 문제, 조직 및 구성원의문제로서 임나일본부 구성원의 출신을 둘러싼 한일 학계의 차이점이 있다. 이는 각자 사료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앞으로 사료의 대한 해석의 차이를 줄이는데 연구를 해야 하겠다. 


참고문헌

정효운, 『동북아문화연구13』,「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임나일본부’」,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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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 『가야와 임나』, 동방미디어,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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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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