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
북한학계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당나라 오랑캐와 연합하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킨 민족적 배반 행위라고 비판 한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도 신라의 삼국통일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삼국을 통일 하지 못했을까 백제의 경우는 삼국을 통일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고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충분히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데도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었을까?
Ⅱ.본론
1.고구려의 남진과 백제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발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중략),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왕이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아신왕)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백 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6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6년에 백제를 공격해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멸망시키지도, 백제 수도 한성을 빼앗지도, 아신왕을 죽이지도 않고, 국내성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 대신 열 명만을 볼모로 잡아간다.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 21년
장수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보이 듯 475년 고구려 군이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한 사실과 개로왕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남양만에서 충청도 북부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2.고구려의 남진과 신라
10년 경자 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10년
백제와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구려에 저자세 외교를 벌이고 있던 신라는 광개토 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경자년 출병’이 단행 되었다. 이는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까지 영향력을 확대 시킨 것이다.
장수왕시기의 고구려는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심지어는 왕위계승문제에까지도 깊숙하게 간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압박은 신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위협을 느낀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통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고구려 장수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표면화 되어 고구려는 이제까지의 우호 관계를 파기하였다. 454년 처음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그동안 축척된 신라의 힘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들이 무너져 물러갔다. 그들을 추격해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
장수왕68년(481년)에 고구려는 호명성을 장악하고 미질부까지 진군해 내려왔다는 내용이다. 당시 고구려군은 경주 부근까지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곧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의 반격을 받았고 고구려 세력은 소백산맥 이북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3.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한 이유
첫째, 백제가 비록 고구려에 패배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백제는 동성왕(499년)에 양나라에 문서를 부내면서 고구려에 패한 바되어 한동안 쇠약했지만, 이제는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워 이기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했다. 불과 25년 만에 국력을 회복할 만큼 기복적인 힘이 강한 나라였다. 그런 만큼 고구려가 백제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는 많은 군대가 필요했다.
둘째, 백제와 신라 모두 수백 년간 나라를 유지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속국이 되고 통합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두 나라는 나제동맹을 이루어 적극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것이 고구려가 두 나라를 쉽게 통합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셋째,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남쪽에 과다한 힘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즉,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남쪽에 대규모의 군대를 오랫동안 둘 수 없었다. 또한 북방에서는 거란족과 돌궐족이 흥기하고 있었기에 북방의 위협을 감수하고 한반도 점령에 힘쓰기 보다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것에 만족하였다. 고구려로서는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중심의 천하체제에 편입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Ⅲ.결론
고구려의 남진과 그에 따른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보고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고구려로서는 두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 과다한 힘을 쏟는 것보다는 비교적 힘이 덜 들면서 고구려에 도움이 되는 북방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가 정복하기도 힘들 뿐, 현실적으로 고구려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신라의 통일에 대한 관념은 신라의 위협세력인 백제와 고구려를 없애 나라를 온건히 하자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현실적인 위협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통합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고구려와 신라가 가진 통일에 대한 생각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전의 제약을 가져왔고, 뒷날 멸망의 주요원인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 1998
이기백,『한국사 신론』, 일조각, 1999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2007
이덕일·김병기,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역사의 아침, 2007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