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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2시간전

이광수는 민족주의자인가, 민족반역자인가

1. 선각하지 못한 선각자

춘원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사망하고, 열흘 뒤 어머니도 사망하자, 여러 친척집을 전전하던 그는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친일단체인 ‘일진회’에서 만든 학교에 들어가 일본어와 산술을 배웠다. 그해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처음으로 일본으로 간다. 1910년 졸업 후 정주의 오산 학교 교장의 초청으로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세 번째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다.

1917년 4월 허영숙을 만나고 한일 병합 이후 조선이 크게 발전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한다. 1920년 2월 8일〈2.8 독립선언문〉의 수정에 참여한 후, 이 선언문을 해외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건너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 후 자신이 쓴 시와 평론을 국내에 보내기도하여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 받는다. 그해 5월 돌연 귀국,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난다. 9월에 사이토 총감과 면담 후 11월 〈민족개조론〉을 집필해 큰 충격을 준다. 1939년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만들었던 ‘수양동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회원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많은 고문을 당하자 소위 ‘북지황군 위문’에 협력함으로써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친일 문학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의 회장이 되고, 1940년 1월 일제가 창씨개명 제도를 도입하자 3월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라고 개명을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그 해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자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학병 권유 연설을 하여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8.15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의 특경대원이 친일 행위를 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춘원의 집을 찾았다. 특경대원이 춘원에게 “해방이 된 지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해방이 1년만 늦었으면 조선 사람들은 전부 황국 신민이 됐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다음 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평양에서 강계로 가던 중 1950년 10월 자강도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2.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 리스트’ 이광수

한국사 논의에서는 단일 민족의 범주에서만 내셔널리즘을 인정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이루어졌지만, 그 반면에 실재했던 민족주의의 폐해는 처분되고 순수하게 완성하여야 할 ‘진짜 민족주의’가 떠올랐다. 다원적인 민족 문화의 주체성과 상호 개방성을 옹호하면서 ‘민족의 얼’을 체계화하자는 문화 본질주의의 역사관이 그것이다. ‘친일’이 식민지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있을 수 없었던 역사의 한 단면으로 재인식되고 있으나, 여전히 ‘반․비 민족성’의 죄과로 심판하고 있다. ‘친일’을 민족의 이름으로 배제하는 ‘민족사’ 만들기는 자민족의 긍지를 살리기 위하여 침략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 만들기 모임’의 민족정서와 다르지 않다. 그 시대의 유명 인사들이 ‘친일파’로 확인된 것은 그들의 삶을 지배한 권력 운동이 단일 민족론과는 양립할 수 없는 ‘내선일체’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국민국가의 실력’을 확실히 인식하고 힘 있는 국민 주체를 욕망한다. 비록 국가 주권을 상실한 상태이지만 조선의 문화 운동론, 실력 양성론자들은 문명·문화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근대적 국민 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이 서양 문화를 수입하는 데 성공하고 나서 동서 문화를 융합하는 신문화를 조성하려 하는 것처럼 우리도 아시아 민족으로서 신문화 산출을 민족의 이상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식민지의 몰이상 상태에서 벗어나 ‘아시아 신문화’를 건설하자는 태도는 일본과 조선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결부 시킨다. 근대 독립 국가의 힘이 ‘문명’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만큼, 그는 힘없는 ‘저항’을 ‘제 살 깎기’로 판단했으며, 식민지 통치 질서에 편입되어 살려했다.

그의 딜레마는 주권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힘 있는 국민의 형성을 목적한 데 있다. 이른바 문화 통치 시기에는 조선민족에게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 민족주의의 독자성을 표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 후에 조선의 민족운동은 거세되고 조선의 내셔널리즘은 일본 내셔널리즘을 대리 수행하게 된다.

동우회사건이후 ‘내선일체’를 위한 이데올로그로서 활약하게 된다. ‘내선일체’의 제도화는 결코 ‘내선’의 평등이나 조선인의 이익을 위한 공공의 기획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은 평등하지 않지만, 늦어도 30년 후의 자손은 조선인이라는 비애를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30년 후에는 평등한 일본인으로 융합되리라는 기대, 강자의 행복을 동경하는 탈식민지의 수사는 식민지 총동원을 위해 만들어진 ‘내선일체’를 처절하게 믿는 굴절된 신앙이다.

강제적 폭력(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신사 참배, 징병과 징용)의 현장에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나’는 폭력에 협력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오로지 잔존하는 것이다. “일본인과 평등권을 얻는 것”이 “민족적 행복의 절대 가치”를 증진시키며, “정치적·경제적·군사적 훈련”을 받는 것이 “민족적 실력을 양성”한다고 믿었다.

미군정 시기에 미국을 적대시하던 ‘친일’에서 ‘친미’로 돌변한 모습을 보고 그를 ‘변절의 천재’인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다.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에 ‘친일적’이나 ‘친미적’인가문제는 상황 변수의 불가하다.

이광수가 추구한 힘과 행복도 절대로 ‘민족’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친일’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심판 할 수도 없겠다.


3.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어떠한 범죄도 성립될 수 없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 노릇하던 놈도, 높은 벼슬하여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지만 하나의 가정을 세워 춘원 이광수의 친일행적에 대해 접근해 보려한다. 만약 이광수가 훼절하지 않고 민족문학가로서 해방을 맞이했다면, 아마 우리의 해방은 보다 값진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감옥과 한촌은 커녕 친일 배족의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8·15를 맞았다. 그에게 8·15는 해방도 광복도 아닌 청천벽력의 '비극의 날'이었다. 일제 말기 고명한 문학가로서 친일에 앞장선 그의 대단한 사회적 위치만큼이나 반민족적 패악의 그림자 또한 짙다. 그는 글과 연설을 통해 일본 천황과 침략정책을 찬양하고 조선혼, 조선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그의 초기 업적이 어떠했든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조국을 배반한 행위는 결코 용납되기 어렵다. 업적은 업적대로 공정하게 평가하되 친일 반민족의 행위는 그것대로 준엄하게 단죄 받아야 한다.

이광수는 해방이 될 때까지 매일 빠지지 않고 일본 신궁을 향해 절을 하고, 일본 옷을 입고,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자기의 서재에 일장기를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묵례했다. 남대문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두 손을 합장하여 조선 신궁을 향해 묵도를 했고, 화제중에 일본 천황이 오를 때에는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정좌했다. 이토록 몸과 정신이 철저하게 '일본화'된 사람이 이광수이다.


추악한 기록 ➀

이광수의 친일매족의 글은 여러 장르를 통해 숱하게 발표되었다. 하나같이 일본 천황을 숭앙하여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조선청년들의 징병, 학병 권고문 따위의 민족을 배역하는 내용이다.


추악한 기록 ➁

이광수, 「조선의 학도여」(『매일신보』, 1943.11.4)


추악한 기록 ➂

이광수는 태평양전쟁(1941)의 발발과 더불어 각종 언론매체의 신년호에 많은 신년시를 기재하였는데 그 모든 내용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추악한 기록 ➃

변절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 주인에게의 과잉충성과 함께 자신이 속했던 모체를 가해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자 하는데 이광수 또한 그의 글에서 이러한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광수, 「모든 것을 바치리」 (『매일신보』, 1945, 1, 18)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추악한 기록 ➄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단순히 '문학'적인 부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국민운동'의 차원에서도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이광수, 「긴급한 시국과 조선인」 (『매일신보』, 1942, 1, 12) 이란 글은 전시체제하 국민생활의 준범을 교시하는 내용으로써 이광수가 얼마만큼 일본 제국에 충성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다.


4. 맺음말

이광수의 친일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 이들은 그의 행동이 민족의 행복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였다고 했고, 민족 반역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고 있다. 이 좁혀질 수 없는 두 관점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서 올바른 길을 찾도록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중신,《3일간의 소설여행》, 대한교과서, 2006

박지향,《해방 전후사의 재인식1》, 책세상, 2006

박도, 항일유적답사기《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우리문학사, 2000

김삼웅, 《친일파·Ⅱ》, 학민사, 1992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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