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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한국 무용사

by 수근수근


서론

우리나라의 무용은 크게 왕실 중심으로 발전된 궁중무용과 민간중심으로 발전된 민속무용으로 대분할 수 있는데, 왕실 중심의 궁중무용은 대부분 인접해 있는 다른 나라에서 수입된 외래무용을 소화시키거나 또는 왕실 자체 내에서 창작된 무용이었으며, 민간에서 전승된 것은 아득히 먼 부족국가 시대에 발생한 민족적인 것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1.한국무용의 기원

상고시대의 우리 민족은 어떤 영혼이 떠돌다 인간에게 붙어 질병을 일으켜서 사망하게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점점 굳어갔다. 여기서 주술과 무축, 그리고 가무의식이 발생하게 되었다. 단군시대에 제천의식은 가무음곡을 동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라서 우리의 무용은 토속 신앙 제천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무용의 원초적인 시발은 상고시대의 제천의식에 기원을 둘 수 있다고 하겠다.


2.부족국가시대의 무용

樂, 歌, 舞 총체형식으로서의 춤

이때의 춤의 목적은 하늘과 신을 즐겁게 하여 그 해의 추수를 감사하며, 오는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수렵제 형식에서 농경제 형식으로 넘어오면서의 과도적인 상징과 비상징의 절충형 무용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1)부여

부여는 북만주 장성 이북에 위치했던 나라로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해 있는 농경국가로 추측된다. 이들에게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는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추수제의 이름은 영고라 했는데 12월에 해당한다. 추수를 끝마치고 공동대제일을 맞이하여 음식과 가무로서 신을 맞는다는 의미로 즐겁게 놀았던 것이다. 특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시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원시 집단 무용의 원형이 아니었는가 싶다.

또 싸움에 출전하기에 앞서도 천신제를 지내고 소굽으로 길흉을 본다던가 또는 영고 등이 모두 고대 무속의 유풍일 것이다.


2)동예

원산근방에 위치했던 부족국가로서 남으로는 진한,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 동으로는 동해에 접한 농상을 주로 한 국가이다. 별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쳤으며 매년 10월이 되면 무천이라 하여 추계공동대제를 거행하여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 한다. 이 또한 원시 집단무용의 원형으로서 고대 무속의 유형일 것이다.


3)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부족국가이며 생산력이 부족하고 강적이 둘러싸여 싸움이 많았고, 용맹과 침략을 좋아하여 굽힘이 없는 정신의 국가이다. 동맹이라는 주몽에 대한 축제와 10월제는 주몽과 하백녀에 대한 제전으로 남녀가 무리를 지어 주야로 가무를 했다는 것은 부여, 동예와 같이 고구려의 무용 역시 집단무요의 형태로서 어디까지나 신 중심의 무속무용이었으며, 이는 지금의 농악의 원형으로 보아진다.


4)삼한

삼한이란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키는데 이 세 부족국가는 대체로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농사가 그들의 생활경제를 좌우 했으며 낙종기와 추수기의 계절제가 성했던 것이다. 즉, 낙종기가 끝난 5월에는 군중이 모여 부락공동체로서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밤낮을 쉬지 않고 놀았으며 농사가 끝난 10월에도 역시 그러하였다고 한다. 마한에서는 축제놀이 가운데는 수십인이 한조가 되어 무도하는 형식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중국의 탁무와 같다고 했다. 탁무란 중국의 한위지조무용 중에서 잡무와 아무가 있는데 그 중 잡회 하나로 목탁을 손에 들고 무도함으로써 얻은 이름으로 후에 궁중연회에서 연의된 무용이다. 변한과 진한 사람들도 가무를 즐겼는데, 이들은 무도를 할 때 벌써 중국의 고악기인 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축은 가야금 같은 현악기였다고 한다. 진한, 변한, 마한의 축이 오늘날 가야금의 원형일 것이고, 마한의 무도는 오늘날 농촌에서 동제를 지낸 다음 행하는 농악, 신악의 원형, 즉 두레의 소속의 원시형 가무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신을 섬기면서 집단적으로 행한 가무는 영고, 동맹, 무천과 같은 유형일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도당굿의 원형으로 보아진다.


3.삼국시대의 무용

예술 형태로서의 춤의 태동


1)고구려의 무용

고구려 고대문화 중 무용에 관한 기록은 퉁구를 비롯한 평양과 안악 부근의 남은 고분군에서 그 편모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분군에 있는 벽화는 웅장하면서도 야성적인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무용총 벽화에서는 당시 고구려 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은 벽화를 통해 그 모습을 엿 볼수 있다. 대체로 움직임이 직선적이며 동적이어서 고구려의 강건한 기질과 연관됨을 알 수 있고, 무용과 음악이 각기 독립된 형태로 나누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춤의 형태가 제의 형식이 아닌 오락적 요소, 즉 보는 자와 추는 자의 관계로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족구가 시대의 동맹이라는 제천의식에서 즐겨 사용했던 장엄한 음악과 샤먼적인 무속의 형태에서 탈피하여 고구려 국민성 자체가 강건하고 용맹스러운 기질이기에 그에 따라 발랄한 모습으로 발전된 것으로 짐작되며, 또한 대륙의 영향을 받아 세련되고 합리적인 체계로 발달되어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전파되었던 것이다.


2)백제의 무용

『일본 서기』에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남조의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웠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헌 자료와 유물, 유적 등 자료의 부족으로 무용의 유형과 종류를 다양하게 규명할 수 없어 아쉽다. 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악의 영향을 받았고 이를 독자적으로 발달시켜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며 귀족적인 문화를 탄생 시켰다.

백제에는 가면극 형태의 무용이 발달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파계승을 풍자하고 상류사회를 비판하는 풍자극으로 변모되었다. 오늘날 일보에는 약간의 기록과 그 당시의 일부 가면이 전해오나 그 실체는 남아 있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기록과 자료가 전혀 없다. 하지만 실제 연희로서 전승되어진 점이 다르다.

백제악은 『수서』의 상악이나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악이나 신라악처럼 그 종목이 많이 전해지지는 못했으나 그 당시에는 악무가 성행하였음을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3)신라의 무용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면 통일 이전의 시라무용은 주로 가무백희라는 민속무로부터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그 영토의 크기에 비해 평야가 풍부하지 못하여 낙동강 하류의 가야제국을 통합할 때까지도 생활변이나 문화면에서 가야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도 삼국 중 가장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향토적인 문화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본기를 보면 신라시대의 무용은 이미 금척, 무척, 가척 등 분야별로 분화되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궁중무악이 발달하여 일본 천황의 국장에 80여 명 규모의 장례무악단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무악인의 지위도 높아 궁중에서도 높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문헌상에 나타나 있는 신라의 무용은 궁중무용의 연향무이기 때문에 그 밖에 유형들의 춤은 통일 이후에 전해지는 춤들이며, 병창무용상, 가창무용상, 가면무용상 등의 신라 토우에서 입증되듯이 다양한 유형의 무용이 있었을 것이다.


4.통일신라시대의 무용

1)통일신라시대 무용의 특징

삼국으로부터 전승된 풍부한 음악과 무용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되었다. 서민의 노래와 아울러 승녀, 화랑 등 각 계층의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향가가 만들어졌으며, 악기의 종류도 풍부해짐에 다라 삼현삼죽과 박판, 북, 해금, 장구, 피리 등 관현악 반주에 의한 춤이 만들어졌다.

통일시라시대에는 오기로 불리는 잡희무가 성행하였고, 고구려, 백제의 악기를 흡수하여 다양한 관현악 반주에 의한 춤을 추게 되었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무인들의 무복에 당의 복식을 도입하여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고, 통일 이전보다 무복이 화려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악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여 무악의 체계를 수립하여 궁중무용의 기틀을 완성하였고, 특히 가면무용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의 의식무용과 팔관회, 연등회 같은 가무 축제가 성행했으며, 용신에게 제사지낼 때 추던 호방한 남성의 성격을 표출하는 처용무를 비롯하여 국가를 보호하는 신에 대한 춤이 주를 이루었다.


2)통일신라시대의 무용의 종류

검무

검기무 또는 황창랑무라고도 부르는 검무는 신라를 위하여 백제왕을 죽이려다 죽은 어린 황창랑의 용모와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추면서 조의를 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검무는 단순히 검술의 묘기를 추는 무용이 아니라 동자를 추모하고 용맹함을 기리기 위한 무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검무는 원래 민가에서 가면무로 연희되었다가 고려를 거쳐 조선28대 순조 때에 이르러 궁중의 정재로 연희되기 시작하였다. 김만중의『서포집권』2권의 ‘관황창무’라는 칠언고시에 따르면 이 당시 검무는 여기가 추는 춤이었으며, 조선말엽까지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중에 들어오면서 가면이 없어지게 되었고, 1930년대부터는 칼이 짧아지고 칼의 목을 돌리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때의 춤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춤을 추는 무원 4명은 전립, 전복, 전대를 착용하고, 검기를 들고 춤을 추었다.”고한다.

오늘날 궁중검무와 해주검무, 진주검무, 호남검무 등에서는 4인, 6인, 8인의 겨기 검무를 볼 수 있다.


처용무

처용무는 통일시라의 처용설화와 함께 당시의 민간신앙의 가면무용으로 추어지던 것이 점차 국가의례적인 무용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궁중 나례와 연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용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잇는 궁중 가면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말엽에 발생한 처용무는 고려 초에 팔관회, 연등회에서 산대잡희와 함께 추어졌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변화를 과정을 거쳤으며, 고려 말 이첨의 시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2인이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용무는 호방한 남성적 성격을 표출한 춤이며 음악은 향당교주, 세령산, 삼현도드리, 긴염불 등을 사용하였고, 활달한 동작으로 춤을 춘 다음 창사를 하고 창사다음에는 송구여지곡인 도드리 음악에 맞추어 청, 홍, 황, 흑, 백의 순서대로 퇴장하였다.


이외에도 궁중무용에는 원효대사에 의해 창시된 ‘무애무’, 신무설화에서 비롯한 ‘상염무’, 사선무와 선유락, 다섯 가지놀이를 보여주는 오기 등이 있으며, 불교 의식 무용으로는 법고를 쳐서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법고춤, 요잡이라는 악기를 들고 추는 바라춤, 불법의 상징성이 잘 나타나고 옷이 특징인 나비춤 등이 있다.


5.고려시대의 무용

1)고려시대 무용의 특징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통해 대중적 축제가 행하여졌고, 고려 후기에는 유교와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예악사상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군왕의 공덕을 악가로 만들어 기록으로 남겼다.

고려시대는 신라시대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풍수설이 고려 때에는 더욱 성행하여 전통적인 무속의식도 불교적 행사의 영향을 받아 다채롭게 발전되었으며, 유교와 불교가 조화된 귀족 문화의 황금기로서 신라에 비하여 춤의 종류가 다양하고 예술적으로 승화된 시기이다. 또한 당악과 아악이 수입되고 향악이 정비됨에 따라 각종 민속무용도 여러 유형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가 우리 민족의 무용의 형성기였다면 고려시대는 무용의 예술적 가치관을 구축한 시기라 할 수 있다.


2)고려시대 무용의 종류

궁중무용

궁중무용은 궁중에서 벌어지는 각종 향연에서 교방청에 속한 무기들로 하여금 춤추게 했던 의식무용으로, 본래 중국에 전해진 용어로 ‘왕실을 위하는 각종 행사에 봉공한다’는 뜻의 ‘정재’라는 말로 현재까지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재는 화려한 무복과 도구로써 우아한 음악의 맞추어 장엄한 춤사위로 충과 예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유교적 관념론이 지배되어 형식의 엄격성을 중시하였다.

궁중무용은 향약정재와 당악정재로 나뉜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나라의 고유의 음률을 향악이라고 하며, 당악은 보래 고려조 때 유입된 중국 송나라의 속악을 일컫는다.

궁중무용은 대체로 동작이 다양하지 않다. 하지만 춤사위가 우아하고 선이 고우며 무복의 색깔이나 기본 구성이 유교의 배경이 되는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오방색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동양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


당악정재

당악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수입되어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과 점차양립하게 되었는데, 당악의 전래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악정재는 죽간자를 든 2명의 인도의 따라 출 퇴장을 하고 춤의 앞뒤에 구호와 치어를 부르는데, 죽간자는 춤추는 사람의 복식과 상관없이 녹색상의를 입는다.

고려시대 궁중에서 연행되었던 당악정재는 음력 정월대보름날에 큰 잔치를 열어 군왕을 송축하기위해 왕모가 선계에서 배려와 선도를 바치는 내용의 ‘헌선도’,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내포한 ‘수연장’, 군왕을 송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정재무인 ‘오양선’,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여자 군무인 ‘포구락’, 서역에 있는 탁지무의 일종인 ‘연화대무’가 있다.


향악정재

향악정재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전해 온 춤으로서, 향악기로 연주하며 우리나라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며 춤추는 것을 말한다. 향악이라는 용어는 신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속악이라고 하였다. 이 용어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악학궤범』에서 처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향악정재에는 충렬왕 때의 이혼에 의해 창작된 춤인 ‘무고’, 불교 포교무인 ‘무애’,군왕만세 천하태평이라는 4글자를 만들어 춘 춤인 ‘왕모대무’, 대체로 신서의 말을 본떠서 지은 것이라고 한 ‘동동’, 나이 어린 여기 8인 추는 ‘향발무’가 있다.


민속무용

민속무용은 민중의 성격을 가장 많이 표출된 춤이며, 민중들에 의해서 추어지는 무용을 말한다. 따라서 민속무용에는 민간의 풍속과 관습이 잘 반영되며 그들의 공통된 희노애락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속무용은 자연환경이나 생활풍습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 그대로 전승되기 때문에 민간의 실생활과 함께 하면서 민중의 가슴 속에 면면히 숨쉬고 있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민속무용에는 민중에 의해 독창적으로 발전한 ‘탈춤’, 서생들의 벼슬에 오르기를 희망한 춤인 ‘한량무’, 농업이 시작될 때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것인 ‘농악’, ‘놋다리밟기’, ‘차전놀이’등이 있다.


의식무용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식은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조신을 위한 제사, 산천신을 위한 제사, 기우제 등으로 분리되어 고려시대로 계승되었다. 대표적으로 궁중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쫒는 행사로 거행하는 의식무의 일종인 ‘나례’가 있다.


6.조선시대의 무용

1)조선시대 무용의 특징

조선시대 무용은 유교를 바탕으로 국가질서가 확립됨에 따라 불교의식인 팔관회와 연등회 의식은 축소되었고, 산대잡극이나 나례는 고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더욱 성행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또한 나례도감 또는 산대도감이 설치되어 국가적인 행사나 중국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 무용이 연희되었다. 특히 나례는 잡희무가 확대되면서 나희로 인식되었는데, 무용이 주축이 되어 행해지면서 민속무용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조선의 민속무는 산대도감 계열의 무용과 남사단패가 갖는 각종 잡희 춤, 무속에서 파생된 무속무, 농민을 위주로 하는 농악무, 사찰에서 행해지는 사찰무, 기녀들의 기방무 등 그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이들 각각의 특성이 어우러져 면면히 이어진 춤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무대의상이나 무대장치가 없으며 음악 또한 자연스러운 가락이 주를 이룬다.

또한 조선시대는 왕실과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수단으로 음악과 무용을 폭넓게 도입함에 따라 궁중악과 궁중무용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시기를 궁중정재의 전성기라고 일컫는다.


2)조선시대 무용의 종류

궁중무용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예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 음악과 함께 정재무용도 많은 종류가 창제되었으나, 예술적 안무의 구성보다는 개국창업을 칭송하고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세종 때는 우리 국악의 기초가 확립되었고, 영 정조 때는 외연에서 쓰던 정재는 당악원에서 관장하였다. 그리고 음악과 무용에 관한 서벅인 『시용무보』,『악학궤범』 등이 다수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으로는 태조의 창업을 기리기 위한 ‘몽금척’,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에서 장차 그가 등극하리라는 글이 적힌 기이한 책을 얻어 바쳤다는 내용의 ‘수보록’, 하륜이 지은 근천정의 악장을 무악화한 춤인 ‘근천정’, 상아로 만든 작은 박을 두 손에 들고 치면서 추는 5인무인 ‘아박무’, 향악정재의 하나로 향발을 가지고 추는 궁중정재인 ‘향발무’, 학무·연화대무·처용무가 합쳐진 ‘학연화대처용무합설’, 한나라의 반무와 진나라의 배반무에 영향을 받은 향악정재인 ‘보상무’, 효명세자가 순종숙황후의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창제한 정재인 ‘춘앵전’ 등이 있다.


의식무용

대표적으로 일무가 있는데 이 무용은 종묘제례악에서 문묘와 종묘의 제사에서 춤으로 일은 벌려서 선줄을 의미한다. 팔일무는 8열 8줄로 64명이 추는 것이며, 육일무는 6열 6줄로 36명이 추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춤추는 사람의 숫자도 신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며, 천자는 팔일무와 육일무, 사대부는 사일무를 추었다. 이일무는 선비에게 쓰는 춤이다.


무속 무용

무속 무용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신앙인 굿의 정차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춤으로 일반 백성에 의해 조선조 말기까지 널리 행하여졌다. 종류로는 ‘오구굿’, ‘안택굿’ 등이 있다.


민속무용

민속무용은 주로 서민들의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춤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춤이며, 향유계층이 민중이다. 서로 손을 잡고 도는 ‘강강술래’, 불교의식무에서 파생됐다는 기원설이 있는 ‘승무’, 액을 풀어내는 뜻의 무속의식에서 유래된 ‘살풀이’, 조선 후기부터 남사당패들에 의해 시작된 일종의 무용극인 ‘한량무’, 입타령하면서 출수 있는 대중적인 춤인 ‘입춤’등이 있다.


참고 문헌

김혜정, 이명진『한국무용사의 이해』 형설 출판사 2003

김매자『한국무용사』 삼신각 1995

김효분『한국 전통춤의 흐름』 현대미학사 1998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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