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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시기 유학자 동중서

by 수근수근


1. 활동 시기(무제)


무제는 BC 141년 16세의 나이로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BC 87년까지 5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치·군사·문화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겨 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무제의 업적은 크게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일과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일을 꼽을 수 있다.

무제는 즉위 후 전대의 권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유학자인 동중서의 현량대책을 받아들여 유학을 관학으로 하였으며, 장안에 태학을 설치했다. 유교 경전인 오경에 박사를 두고, 그 아래 각 10명 씩의 박사제자원을 두어 매년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인물을 관리 후보인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BC 134년에는 지방의 군국에서 효행이나 청렴한 덕목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을 천거받아 낭중으로 임명하는 효렴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문신 관료 중심의 유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2. 생애


동중서(기원전 176년?~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현재의 허베이 성에 속하는 신도국 광천현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젊어서 《춘추공양전》을 배우고 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은 천명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나 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의 상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의 재이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 공손홍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의 국상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인 장탕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의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와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의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3. 사상


그의 유교학설은 통일을 강조하고 군주권 확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춘추》를 그러한 이념을 구체화한 저술로 받아들였고, 천하통일이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통일의 대원리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를 <나라의 근본>으로 받드는 태도라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줄기와 가지, 또는 본,말의 관계라는 것이다.

유교의 종교성을 부각시켰다. 그의 천인감응론은 하늘을 자연과 인간사회 양자를 주관하는 존재로 파악하여, 인간의 일에 대해 감응하는 능력과 의지를 갖춘 인격신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자연과 사회의 모든 변화나 국가의 흥망, 인간의 재앙과 복은 결국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삼강과 오상을 도덕적 규범으로 제시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은 아들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중서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차별화를 <임금은 신하의 근본>,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라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 설정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삼강이었다. 오상은 <어짐>, <의로움>, <바름>, <지혜>, <믿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이러한 덕목은 갖춤으로써, 인간은 서로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던 것이다.

교육방법은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기보다 상호간에 학문을 전수하는> 방법을 내왔는데 말하자면 제자가 입문하면 스승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기보다 기존의 학생으로부터 스승의 학문을 전수받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말미암아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으며, 그는 마침내 <전한시기의 공자>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4. 저서


《춘추번로》는 동중서의 저작이다. 춘추시대의 노국의 연대기 《춘추》의 기술 속에 공자가 은연중 불어 넣은 역사 비판의 정신을 밝히려 하는 것이 공양학인데, 《춘추공양전》이 그 근거가 된다. 《춘추번로》는 《공양전》에 기준하였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동중서가 그 당시 한 왕조의 정치체제에 철학적 근거를 확립하려 했던 책이다. 번로라는 명칭은 《한서》 〈동중서전〉에 그 저서의 1편의 이름으로서만 게재되어 있다. 또 같은 책 〈예문지〉에도 그의 저서로서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공양동중서치옥십륙편》, 《춘추결옥이백삼십사》만이 게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춘추번로》 17권 82편(그 중 3편은 없음)은 전부가 동중서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설도 있다.

《춘추번로》에 보이는 동중서의 특징적인 이론은 다음과 같다.

현과 불초, 덕과 형, 경과 권 등의 가치의 상하를 절대화하는데,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다고 하는 음양설을 강조한다.

왕의 독존성을 논술할 경우에 천·지·인의 3을 '一', 즉 도로 관통한 것이라고 하는 것 이라하였다. 또 왕은 황·방·광·황·왕과 통하여 천하가 귀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후한의 문자학자 허신의 《설문해자》에도 채용되어 있다.

《춘추》의 권위를 숭상하여 춘추는 바로 공자가 한 왕조를 위하여 미리 법을 제정해 준 ‘대의미언’이라 주장한다. 이 점이 후한의 공양학자 하휴에 의하여 삼세이사설·이내외설 등으로 정비되면서 공양학은 더욱 발전되어 간다.

백·적·흑의 삼통순환설에 의하여 왕조의 혁명과, 그것에 수반하는 역법과 복색의 개정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일면 5행설에 기본하여 ‘토’를 5행의 중추로 삼고 한 왕조를 그것에 해당시키고 있다.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3공·9경·27대부·81사를 ‘천지수’에 합치한다고 하는 천인상응설과, 천의 견책은 우선 ‘재’로 나타나고, 이어 하늘의 ‘이’가 내린다고 하는 재이설 등으로 천위를 강조한다. 동중서, 하휴 등이 전개한 한대의 공양학은 그후 크게 떨치지 못하였으나, 19세기 청조 후기의 중국의 위기에 즈음하여 부활되었고, 《춘추번로》의 주석도 수종류 나왔다. 그 중에서 소여의 《춘추번로의증》은 공양가에 편벽되지 않은 입장에서 쓰였다.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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