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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대외교역의 확대와 현안 인식 타개방안의 모색

by 수근수근

1.머리말

1880년대 이후 급속히 확대된 대외 무역은 국내 경제계전반에 걸쳐 큰 변동을 야기했다. 이는 기존의 체제와 인식에 위기를 초래함과 아울러 각 사회 주체들이 새롭게 변신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대외무역이 공식화되는 1870년대 후반까지를 1기, 대외무역이 본격화하여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1880년 전후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를 제2기, 그리고 대외교역이 급증 하면서 각종 현안이 부각되는 1890년대 후반을 제3기로 구분하여, 각 단계를 거치면서 부각되는 현안과 그에 대한 인식상의 변화에 특히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2.대외교역의 확대와 현안의 부각

1)대외교역의 확대와 국내 경제계의 변동

대외교역은 개항 이전에도 이미 음성적으로 상당히 이루어졌고, 정부는 양화(洋貨)가 널리 퍼지는 것이 밀무역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밀무역의 차단에 크게 신경 섰다. 제2기에 들어 대외교역이 본격화하면서 ‘양화’로 표현되는 새로운 상품의 유입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제3기에는 제2기보다 더욱 늘어 필수품뿐 아니라 각종잡화나 사치품들도 유입되었다. 그 대외교역의 주된 대상국은 일본과 청이었으며, 미국과 독일에서도 수입이 상당하였다.

애초 양화의 수입이 확대 되면서 막대한 비용과 사치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시기가 흐르면서 쓰기 편하고 보기 좋다는 인식이 바뀌면서 그 유입이 날로 늘어났다. 교역양이 늘면서 수출품의 주종이던 미곡의 교역상 비중은 갈수록 증대하였고, 쌀값이 떨어지면 대외무역이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 되었다.

한편 대외교역의 확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동을 초래하였다. 우선 유통체계가 크게 변화하였다. 이런 유통체계의 변화에 따라 미가의 결정의 독자성을 잃어 개항항의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곡물의 가격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오르내렸다. 이에 대비해 정부는 미가가 급등하면 외국미를 수입하여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2)교역에 따른 현안의 부각

외상의 침투는 조약상 한성개잔과 내지통상이 보장됨에 따라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 1880년 전 정언 허원식은 폐해에 대해 지적하였다. 하지만 조계의 설정이나 통행의 규제도 없이 한성개잔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도성 전역은 외상에게 전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의 이익은 외국인이 가져가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해독을 입게 되었다. 한편 외상의 내지행상은 1880년대 후반부터 늘어났다. 이로 인해 외상의 상권 침탈과 국내 상업 질서의 문란은 극심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강한 질책도 나왔다.

대외교역이 크게 확대되는 데 반하여 화폐 제도가 그에 따르지 못함으로 전폐는 갈수록 심해졌다. 제3기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은전을 썼는데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


3. 무곡체계의 변동과 상업 무역에 대한 인식의 변화

1)새로운 무곡체계의 성립에 대한 인식

대외교역이 확대되고 새로운 무곡체계가 성립됨에 미곡은 경제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방곡’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어갔다. 방곡으로 인해서 곡식의 유통이 막혀서 값이 뛰어오르는 사태를 일으킬 뿐이고, 자기 고을만 이롭게 하려고 주위의 여러 고을에 해를 미친다. 그리하여 정부는 방곡을 행할 경우 파직하였다. 이처럼 방곡을 엄금한 것은 서울과 지방 및 지방상호의 곡물 유통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2)상업 무역에 대한 인식의 변화

대외교역에 부정적이던 정부 관료나 유학자들은 양화의 유입을 ‘사치’와 연관시켜 이해했다. 그러나 대외교역 및 양화의 유포를 사치와 연관시켜 파악하던 경향은 제2기 들어 대외 교역이 본격화 되면서 크게 바뀌었다. 대외교역을 긍정하면서 그 유익함을 적극 주장한 논설이 신문에 많이 실렸다. 나아가 대외 통상은 당연하고 유익한 것이고 외국과의 교제를 친밀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외상이 와서 ‘장사를 하며 취리를 하드래도’ 조선에서 쓰는 그런 외국 사람은 조선에 많이 올수록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4.현안 타개방안의 모색

1)교역의 손익 시비

대외교역이 본격화하고 그에 따른 각종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그 유용성을 둘러싼 시비가 이어졌다. 주장의 갈래를 지어보면, 하나는 교역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금지 제한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역을 긍정적으로 보는 가운데 유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우선 전자의 겨우 양 왜와의 교역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던 개항 전에 지배적이었다. 개항 이후 재2기에 들어서도 대외교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어졌지만 전면 부정보다는 교역 제한론의 성격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제3기에는 이처럼 대외교역이 유용성을 부정하는 주자에 대해 현실의 대세를 외면한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꼬집는 논설이 이어졌다. 이러한 논설들은 자연스럽게 제3기에 크게 부상하는 교역 확대론으로 이어진다.

2)교역의 경쟁력 강화

교역의 손익에 대한 시비는 있었지만 시기가 흐를수록 대외 통상교역의 대세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불평등과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대외교역의 불평등성에 대해서는 우선 외상의 한성개잔과 내지통상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고 세계 대세를 따라서 대외무역을 통한 부국강병, 나아가 최고의 국가를 이루기 위한 방안은 제3기에 주로 논의 되었다. 대외교역의 유용성을 인정한 토대에서 절실히 요구된 것은 대외 경쟁력의 강화였다. 그 방안으로는 공업의 조장을 통한 제조업 발달이 우선 제시되었다. 그리고 상무와 흥왕과 통상의 진보를 기하기 위해서는 외양만 신경 쓰지말고, 상공학교를 만들어 인민을 교육해야한다고 하였다. 또한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요긴하며, 무거운 엽전 보다는 지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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