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개항이후 아래로부터 저항과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던 조선왕조 지배층은 두 계통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하나는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정치적 변혁과 토지개혁 없는 근대화를 추진한 개화파 중심으로 갑오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정을 전제적 군주제로 전환하여 국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또한 토지개혁 없는 근대화를 추진한 고종과 그 측근 관료들이 주도한 광무개혁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은 대한제국기 중앙정부와 상인층의 상호 의존적 관계가 잘 나타난 사례이다. 다시 말해 이 은행은 우리에게 정부의 지원 아래 경성 개성 인천 등 기호지반 도고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하는 과정에 담긴 역사적 의미에 접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광무정권의 후원과 발기 총회
1)정동파의 정치적 쇠퇴
일본이나 미국과의 교섭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지위를 획득한 안경수, 이완용, 이윤용, 이채연등은 정동구락부 세력은 독립협회의 활동이 정치운동을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자 독립협회로부터 이탈하였다. 격변기에 정치무대의 중심에서 잠시 벗어나 있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정동파는 정치적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2)기호상인의 황실 접근
안경수를 위시한 정동파와 고종의 호의적관계가 파탄난 후에 정동파는 상인에게는 광무정권과 연결되는 통로가 아니었다. 상인들은 직접 황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측근을 통해 믿을만한 자인지를 확인한 후에 은행 설립 논의를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1899년 1월 29일에 대한천일은행의 발기총회를 열었다.
3.황실 관리와 기호상인의 공동 출자
1)고종의 자금지원과 주주 동향
고종은 내탕금을 하사하여 초기운영 자본을 확보하고, 곧 주주 12명, 자본금(23주) 1만 1500원을 모으고 1899년 말에 이르면 주주가 좀 더 늘어 18명(주금15000원)이 되었다. 이당시의 주주동향은 황실과 가까운 관리 및 상인들이 많았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상인들의 투자가 늘어난 시기는 1900년이었다. 이 해에 주주가 된 자들은 모두 상인이었다. 이렇게 상인의 참여가 늘어난 것은 은행영업의 수입금과 특히 개성상인들은 인삼문제 때문이었다.
2)영친왕의 은행장 부임과 상인의 투자 증가
1902년에는 영친왕이 주식 16주(8000원)를 취득하고 은행장에, 긍의 대리인 이용익은 은행 부장에 취임하였다. 6세의 불과한 영친왕이었지만, 그의 등장은 대한천일은행이 황실은행이란 이미지를 지니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으며, 이용익의 등장은 그가 대한천일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직접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이후 주주들로 참여한 자들은 대부분 상인이든 관리건 대부분 황실 및 이용익과 거래가 있거나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과 인연이 있었다.
4.황실 관리와 기호상인의 경영진 공동구성
1)황실, 관리 : 은행장, 전무이사
고종의 측근이며 보부상, 시전상인, 객주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던 고위관리들이 은행장, 부은행장, 전무이사 등 요직을 맡았다. 그 중에서 광무개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내장원경 이용익의 최측근 최석조는 전무이사의 직위로 설립 초기부터 일제에 의해 휴업 할 때까지 은행을 실질적으로 경영하였다.
2)기호상인 : 본점 실무 담당과 지점운영
상인조직의 사용인체계는 은행조직 구성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경성, 개성,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던 도고상인들은 은행의 여러 실무를 관장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본점에서는 감사원, 사무원으로는 황실과 관련된 상인들과 시전이었고, 일부 경영진은 개성상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중간실무자라 할 수 있는 서기는 인천객주였다. 지점으로는 인천에서는 인천객주세력이 주도했으며, 개성에서는 개성상인이 주를 이루었다.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