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각성

by 사과

[SUB MISSION-

임무명: ‘백안 여제’ 제거

위험도: 상

시간 제한: 5시간

보상: 생존률 +10%

경고: 실패 시 즉시 폐기]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약간의 웃음기를 띄고 있는 듯 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뜬금없는 목소리의 지령에 잠시 주춤대는 동안, 좀비 같은 소년들은 다시 내게로 들러붙었다.

도망가려고 해봤지만, 이전보다 더 끈질기고 강력한 힘으로 나를 옥죄였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내 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어 끔찍한 키스를 퍼부었다.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팔과 다리를 두세 명의 소년들이 엉겨붙어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나의 약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다른 누구의 도움없이 내 힘으로 이곳에서 벗어나기란 역부족인 듯했다.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촉감이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졌다.

부드럽게 느껴지던 입술의 감각은 점점 통증처럼 느껴졌다.

비명을 질러 보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단상 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TV로 오락거리를 구경하는 아이처럼 히죽히죽 웃어댔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작게 까딱일 때마다, 소년들의 방향이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줄이 달린 꼭두각시 인형들 같았다.


그녀의 장난감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나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순간, 귀 모양의 그것으로부터 엄청난 고통이 전해져 왔다.

다른 감각들은 모두 잊혀질 정도로 강렬한 아픔이었다.

그것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통증이 내 몸에 있는 세포 하나 하나를 다 터뜨리고 부수는 느낌이었다.


“으어어어어!!!”

나도 모르게 야수 같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년들은 나의 모습에 주춤하며 멈춰섰다.

여자도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 마냥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근육과 장기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소년들이 잔뜩 겁을 먹었기 때문일까?

아님, 죽음을 끝에 선 인간의 초인적인 힘 때문일까?

이전과 달리 팔다리를 있는 힘껏 휘두르자 거머리처럼 엉겨 붙어있던 소년들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슬금슬금 기어와 다시 들러 붙는 소년들의 머리채를 잡아 사정없이 패대기 쳐댔다.

심지어는 돌 바닥에 머리를 내리 찧기도 했다.


다가오던 소년들의 눈에 두려움이 비쳤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소년들을 그만 공격하고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몸과 정신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귀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강도가 점점 세질수록 악에 바쳤다.

귀 모양의 그것을 뽑아내려고도 애써봤지만, 그럴수록 그것은 더 내 몸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C50HR을 임의로 해제할 수 없습니다.]

[C50HR을 임의로 해제할 수 없습니다.]

[C50HR을 임의로 해제할 수 없습니다.]


냉랭한 목소리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화가 났다.

나를 괴롭게 하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이것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내 자신이.


갈 곳을 잃은 분노는 뜬금없게도 소년들을 향했다.

모두를 굴복시키고 싶은 악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소년들이 겁을 먹고 내게서 도망치려 할수록, 나는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너네도 당해 봐. 내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느껴 봐.’


소년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리자 여자가 긴 채찍을 꺼내와 휘둘렀다.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채찍이 바닥을 깨 부술 것처럼 매섭게 내려 꽂혔다.

여자는 눈을 감고 읽어낼 수 없는 말들을 계속 되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소년들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표정을 지우고 다시 좀비처럼 달려들었다.

소년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이상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여자가 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시야가 뿌얘지며 점점 흐릿해졌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구나. 이렇게 죽는 건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몽롱한 상황에서 번뜩이는 섬광을 마지막으로 이내 완전한 어둠과 고요가 찾아 들었다.


***


여자는 사냥을 끝낸 포식자처럼 한쪽 구석에서 괴로워하는 지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소년들이 자리를 비키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발작하듯 온몸을 떨고 있는 지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자는 우월함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여자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녀에게 지은은 사냥당한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약한 것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삶에서 누렸던 축복들은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리고 죽음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하등 쓸모 없는 존재.’


소년들은 여자가 가는 길을 따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여전히 바깥 세상을 사는 존재들은 약하고 시시하구나.’


여자는 지은의 머리채를 억세게 휘어잡곤 자신의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지은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반쯤 감겨 있는 상태였다.


여자가 손을 놓자 지은은 넝마 조각처럼 바닥에 널부러졌다.

여자가 쓰러져 있는 지은의 다리를 툭툭 차 틈을 벌렸다.


이 세계의 번영을 위해선 많은 아이들이 필요하다.


이 여자애는 살충제를 맞은 벌레들처럼 단번에 죽어버린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종이다.

살아남았다는 건 강하다는 증거다.

이 여자애가 낳은 아이들은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죽는 순간까지 나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할 것이고.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들을 본 여자는 다시 생기를 잃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재밌어지나 했더니... 자, 다들 우리 낙원의 번영을 위해 힘 써 봐.”


소년들이 쓰러진 지은을 향해 덤벼들었다.

여자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지은이 눈을 번쩍 떴다.

지은의 새까만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소년의 다리에 가장 큰 돌덩이를 뜯어 들고 여제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놀란 소년들이 몸을 던져 막은 덕에 공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재밌네.”라고 말한 순간, 여자의 하얀 피부 위로 새빨간 선혈이 튀었다.

지은은 미친 듯이 돌을 휘두르며 소년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에 튄 피를 닦아 살짝 핥아 맛을 보고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곤 단상 위 소파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채 그 광경을 음미했다.


지은은 마치 빙의된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 새로운 누군가로 다시 태어난 듯 이전처럼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 것도, 누군가를 해치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듯 보였다.


소년들의 머리통이 부서질 때마다 여자는 손에 쥔 채찍을 만지작거렸다.

바위 틈 사이사이로 피가 고였다.


마지막 남은 소년은 공포에 질러 지은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녔다.

깡마른 팔다리로 겅중겅중 도망다니는 모습은 마치 천적을 피해 도망치는 새끼 고라니 같았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 말고는 없는 듯했다.

지은은 소년의 모습을 즐기는 듯 했다.

지은이 절규하는 소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소년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거대한 채찍이 그 둘 사이의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만. 한 명은 남아 있어야 이 낙원이 계속될 수 있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은이 단상 위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뒤늦게 여자가 채찍을 휘둘러 댔지만, 허공에 있는 채찍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지은이 여자 앞에 다다랐다.

지은의 속도는 일반 인간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은이 여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여자도 지지 않고 지은을 공격했다.

주변에 있던 채찍 손잡이로 지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지은이 괴로워 하고 있는 동안 여자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가시가 박혀 있는 짧은 채찍을 손에 쥐었다.

연속되는 여자의 공격에 지은이 열세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채찍은 강력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지은의 살점과 피가 튀어올랐다.


“으아아아아!!!”

지은은 채찍에 맞은 곳이 아닌 귀를 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은은 날아오는 채찍에도 아랑곳 않고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가 걸어오는 지은을 보고 주춤대며 뒷걸음질쳤다.


온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목표물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리자, 여자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주문 같은 말들을 외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지은의 억센 손이 여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커컥...”

멀리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던 최후의 소년이 여자를 돕기 위해 지은의 뒤로 다가왔다.

돌을 높게 치켜들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지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여자의 마지막 숨이 끊어졌다.

지은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뒤를 돌아 소년의 공격을 막았다.


“쿵.”

뒷걸음질 치던 소년이 단상에서 떨어졌다.

별로 높지는 않아 죽지는 않았겠지만, 떨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짚었던 손이 괴기한 모습으로 꺾여있었다.

더이상 미동이 없었다.


지은은 죽은 여자를 어깨에 들쳐 매고 싸움을 즐기며 구경하던 그 모습대로 쇼파에 올려 놓았다.

“크크크…”

지은이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와 전기 코드를 뽑은 기계처럼 모든 힘을 잃고 스르륵 쓰러졌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9화9화 백안 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