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백안 여제

by 사과

“나는 이 낙원의 주인, 아리예요.”

여자는 내가 듣지 못한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천천히, 단어를 끊어서, 정확한 입모양으로 발음했다.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듣지 못하는 만큼 다른 감각에 예민한 편이라 자부해왔는데, 여자의 움직임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여자는 너무 마르고 창백해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기 보다 오래된 석고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흰색에 가까운 회갈색이었는데, 초점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을 볼 수 있는 건가?’ 생각하는 순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지금 나가면 안 돼.”

여자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한 발짝 움직여 내 앞의 빛을 완전히 가리고 섰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이곳은 바깥 소음과 죽음이 닿지 않는 곳이에요. 여긴. 영원히. 안전해요.”

여자의 머리 뒤로 미약하게 들어오는 빛이 그녀를 성자처럼 보이게 했다.


“밖으로 나간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원한다면 평생 이곳에서 머물 수 있어요.”


여자의 말에 힘이 느껴졌다.

의심할 수 없는 힘.

정말 이곳이 안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그녀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 발을 디뎠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해.”

무섭게 나를 응시하는 눈과 달리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어딘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앙상한 손으로 내 팔목을 잡아 끌었다.

체격과 달리 무서우리 만큼 악력이 셌고,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한테 잡힌 팔에 오소소 털이 솟았다.


여자는 익숙한 듯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갔다.

동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고 깊은 듯했다.


여자를 따라 컴컴한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동굴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다보니, 더이상 길이 없는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커다란 광장 같은 공간에 몇 개의 횃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밝혀져 있었다.

밝진 않았지만 공간을 어렴풋이 감각할 수 있었다.


여자가 등장하자 횃불들이 일제히 높이를 낮췄다.


‘이런 깊은 동굴 속에도 센서가 작동을 하는 구나.’

신기한 마음에 횃불 가까이 다가갔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연히 횃대에 꽂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있는 건 어린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무표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이들한테서 어떤 생기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작은 마네킹처럼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섬뜩한 풍경이었다.

한창 호기심 많고 뛰어놀기 바쁠 아이들이 텅빈 눈으로 타오르는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명령에 지배당한 것 같았다.


내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여자가 다시 내 손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여자를 뿌리치고 싶었지만 거대한 힘이 나를 멈춰 세웠다.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을 지배하는 또다른 힘이 느껴졌다.

‘뭐지? 왜 이 여자를 거절할 수 없지?’

여자는 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또다시 입꼬리만 올려 미소를 내보였다.


여자는 나를 데리고 광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패인 것 같은 선이 있었다.


“휘이-!”

여자가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부는 듯했다.

그러자 우리가 딛고 있던 바닥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가 겁을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여자가 나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여자의 반려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쾌하면서도 미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내 맘대로 컨트롤 되지 않았다.


돌은 꽤나 깊이 내려갔다.


여자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허공에 떠 있던 바닥이 아주 무겁고 조심스럽게 땅에 닿았다.

여자가 돌 끝으로 다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라고 하기엔 아직 덜 자란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돌을 다리에 매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낼 수 있을 만큼 엉성하게 묶여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여자는 한 소년의 손을 잡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소년이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턱은 고작 해봤자 한 뼘 정도 되어 보였다.

도움은 필요없었다.


보란 듯 혼자 내려와 여자를 쫓았다.


여자는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화려한 자수가 놓여진 거대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여자가 앉는 자리가 눈에 띄게 푹 꺼져 있었다.


소파는 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연물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여자가 소파에 앉는 순간, 동굴 속의 모든 공기와 에너지가 그녀에게 기울어지는 듯 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여자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소년들이 차례대로 줄을 서 여자 앞에 무릎 꿇고 발에 입을 맞췄다.

뒷줄에 있을수록 매달고 다니는 돌의 크기가 컸고, 매듭의 단단함 또한 차이가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게 현실이 맞기 할까?’

정신은 자꾸만 눈 앞의 풍경을 부정하고 있었다.


어떤 액션도 취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자의 발에 키스를 마친 소년들이 하나둘 내게로 다가왔다.


소년들도 앞서 봤던 아이들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년들을 피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선 여자는 서늘한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자가 웃었다.

광기 어린 섬뜩한 미소였다.


가까이 다가온 소년들은 내 발과 종아리, 손과 팔뚝 등 몸 구석구석을 키스하며 훑어갔다.

소름끼치도록 보드랍고, 끔찍하게도 차가운 감각이었다.


소년들의 입술이 내 몸을 스칠 때마다 내 피부 속 온기가 미세하게 빠져나가는 듯 했다.


‘싫어, 싫다고!’

손발을 휘저으며 소년들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지만 소년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무표정하게 여자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들러붙는 소년들을 억척스럽게 밀쳐냈다.

몇몇은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했다.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힘을 써본 건 처음이어서 잠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아무 짝에 쓸데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멍한 표정의 소년들은 스위치가 꺼지지 않은 강아지 로봇 인형처럼 다시 일어나 나를 쫓아 움직였다.


‘이 여자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범인일까?’

여자는 너무 재밌다는 듯 목을 뒤로 젖힌 채 박수를 치며 깔깔대고 웃어댔다.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며 저토록 즐거워하다니…’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훈이의 처절한 비명과 영은 선생님의 잘린 머리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죽여버리고 싶어. 죽여버릴 거야.’

내 몸 구석구석 뻗어있는 열렬한 살의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C50HR의 일부 능력을 해제하고 ‘백안 여제’에게서 스스로를 구하세요.]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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