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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복수 Sep 16. 2024

갑과 을의 관계

딸과 나


"딸~, '갑'과 '을'이 뭔지 알아?" 


"아니" 


"갑과 을은 윤아와 아빠의 관계 같은 거야. '갑'은 가게에서 '을'을 고용하는 사장님, '을'은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 


"윤아는 '갑'이고, 아빠는 '을'이야." 


"그러니까 나는 사장님, 아빠는 직원이라는 말이네?"


"응 평생이야 평생, 윤아는 평생 아빠 사장님이고, 아빠는 평생 윤아 직원이야. 아빠는 오늘 확실히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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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직장에 '육아시간'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만일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가 있다면, 직장에서 평소보다 2시간 일찍 퇴근하여 내 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제도다. 덕분에 나는 행복하다. 매일.. '갑'과 '을'의 관계를 확실히 느낀다.


방과 후 수업을 마치는 시간은 4시 10분, 나는 미리 4시에 도착해서 아이들이 나오는 서문 입구, 아니 복도 입구제일 앞에 서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입구 창가에 몸을 붙이고, 눈은 복도를 노려보고 있다. 수업은 4시 10분에 마치지만 5분에 마칠지, 15분으로 늦어질지, 혹은 친구와 잡담하느라 딸아이가 더 늦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 멀리 나오는 딸아이의 모습을 잠시라고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을'일 수밖에 없다. 


핸드폰이 없는 딸아이, 다른 아이들 같으면.. 조금 극성인 아빠인 경우에는 마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거나 혹은 문자를 보내둔다. "수업 마쳤어?", "어디쯤이야?", "주차장에서 보자", "아빠 여기 있어!" 라며 나오는 시간을 짐작하고 미리 정해둔 장소에서 만난다. 하지만 윤아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갑'이 있는 곳을 '을'은 열심히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밝은 보름달이 뒷산에 살짝 걸칠 때, 가을 귀뚜라미가 유난히 시끄러울 때, 우리 그때 만나요." 


딸과 나의 관계는 이렇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고, 어느 장소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만난다는 것이 중요한 관계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이 애닳고, 또 즐겁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긴장되고 가슴이 뛰고 복도 끝을 바라보는 내 발 뒤꿈치는 점점 올라간다.

 

복도 끝 저 멀리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 나올 때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야', '아니야', '쟤도 아니야". "저 옷.. 아니야" "저 걸음걸이도 아니야"  4시 12분, 혹시 다른 곳으로 가버렸나? 지금쯤이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계단 끝에서 보일 시간인데.. 실내화 가방은 잘 챙겼을까?, 방과 후 요리수업은 무엇을 했을까? 오늘은 어떤 말로 나에게 첫마디를 시작할까? 기다리다 지친 '아빠시계'는 보름달이 뒷산으로 넘어가 버린 지 오래다. '을'은 항상 이렇게 애가 타야 한다. 


저 멀리서 작고 예쁜 한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서 혼자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 딸, '갑'님이 드디어 납셨다. 굳이 까치발을 낑낑거리며 창가에 눈을 붙여 보지 않아도 한눈에 띄는데.. 왜 그리 혼자만 애가 닳았을까? 아이는 나를 보지도 않는데 저 멀리 입구에서부터 정신없이 손부터 흔드는 아빠가 때로는 부끄러울 때도 있다. 


드디어 한참을 거울 보기를 마친 '갑'님이 '을'을 발견했다. 한걸음, 한걸음.. 사장님이 직원을 대하듯, 무겁고 품위 있게 다가와야 하는데.. 웃으며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온다.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하는데 저 멀리 보이는 확실한 내편, '을' 앞에서는 생각이 나지 않는가 보다. '을'도 아무 생각이 없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아빠와 딸의 시간은 멈춘다. 


입은 조금은 부끄러운 듯, 활짝 웃지는 않지만 산뜻하게 웃고 있고 살짝 처진, 나를 닮은 눈은 검고 빛이 난다. 오늘은 학교에서 머리를 많이 긁었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때론 정신없어 보이지만 윤기 나고 진한 싱싱한 머리는 그대로다 한 올 한 올 찰랑거리며 뛰어오는 딸아이가 아름답다.

 

가까이 다가와서야 작고 오밀조밀한 입으로 말한다. "아빠" 세상 모든 기쁨이 한꺼번에 온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렇게 나는 '을', 딸은 '갑'이 되었다. 그것도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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