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끝없이 펼쳐진 밀밭 위에 그리는 나의 가능성

D-18

by 윤선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Bercianos del Camino (23.8km)
06:00 ~ 11:30



오늘 나의 여정은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 위를 걸어야 한다.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시작했지만,

점점 내 머리 위로 타오르는 태양은 유난히 뜨겁기만 하다.



모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행과 조금 떨어져 묵상을 하듯 이 밀밭 길을 걸었다.

그렇게 너른 밀밭과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는 밀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이 하얀 도화지 같다는 것을.



이 길을 걸었을 당시, 나는 스물 두살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교사 임용을 주로 목표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누구도 휴학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휴학을 하면, 1년 더 임용고시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학점을 잘 받아 조기 졸업을 하고 싶어했다.

휴학계를 내는 사람은 군입대를 앞둔 선배들 뿐이었다.



그런 곳에 내가 입학하자마자 OT에 가서 선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2학년 1학기 마치고 휴학할거에요”



고등학교때 부터 나는 홀로 유럽에 여행을 가는 꿈을 꾸었다.

당시 나는 해외 여행 경험이 전무했지만, 늘 호기심이 많았다.

그 갈증은 책을 통해 풀어낼 수 있었다.

언젠가 낯선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꿈꿨다.



그렇게 나는 정말로 휴학을 했다.

백화점에서 옷을 판매해서 번 돈 700만원을 가지고 4개월 간 유럽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길의 마지막 여정이 바로 ‘까미노 데 산티아고’ 였던 것이다.




이 밀밭을 걸으니 지난 나의 삶이 모두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내 나이가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 와보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딜가든 막내였고,

나를 예뻐해주고 내 도전을 응원해주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가득했다.

신혼여행을 온 부부는 우연히 나를 만나 밥을 사주고, 얻어먹어서 미안해 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나중에 취업을 하고 여행을 오게 되면 너와 같이 홀로 여행하는 친구들에게 밥을 사주면 돼.”

그렇게 나는 여행을 통해 사랑을 주는 법과 사랑을 받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과 배운 것을 떠올리다 보니,

나는 지금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날의 나를 기억하는 추억이 사라지고,

이 밀밭 위에 하얀 도화지가 펼쳐져 있는 것 처럼.

이 종이 위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른 밀밭 위에 나의 꿈을 하나씩 떠올려 채워나갔다.

그렇게 상상을 하니 마치 이룬듯한 행복감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22살이다. 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스스로 다짐했던 순간이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식사를 준비한다.

알베르게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주는 곳도 있다.

물론 식기 세팅이나 설거지는 순례자들이 모두 도와야 한다.

음식값은 도네이션으로 주로 받는다.

자기가 낼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내고 식사를 한다.



오늘 뜨거운 햇살로 인해

함께 걸었던 멕시코에서 온 키케르모 아저씨가 길 위에서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늘에서 쉬시니 이내 괜찮아지셔서 이 알베르게까지 같이 올 수 있었다.



온전히 이 두 발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



오늘 까미노는 나에게 인생에 큰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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