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공간들
어린 시절의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해가 막 쨍쨍하게 떠 있었고, 부모님이 오시는 늦은 밤 전까지는 나의 공상이 활개를 치곤 했다. 나는 빨래집게 여러 개를 이어 비행기를 만드는 엔지니어였고, 높은 곳에서 용기 있게 뛰어내려 날아다니는 영웅이었으며, 구출을 기다리며 애타게 영웅을 찾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또한 나는 아지트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특별한 재료는 필요하지 않다. 이불 한 장이면 된다. 납작하게 펴진 이불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불의 가운데를 잡고 들어 올리는 순간, 이불 아래에는 우주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들쳐 내가 만든 미지로 탐험을 시작한다. 이불 가운데에 들어앉은 나는 우주를 떠받드는 기둥이 되어 공간의 중심이 된다. 여름의 얇은 이불은 흥미가 덜하다. 외부의 빛이 내 세계를 침범하기도 하고,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이불을 덮고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의 두꺼운 이불은 절로 흥미가 돋는다. 겨울의 이불속은 포근한 어둠이 몸을 감싼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정한 환상이 시작되곤 했다. 한참 몰두한 탓에 뜨끈해진 공기에 땀 흘리다, 이불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았다.
이불로 만족할 수 없던 나는 점차 영역을 넓혀간다. 서랍장 옆 구석진 공간에 두꺼운 앨범으로 벽을 세워 아지트를 만들거나, 빨래건조대 위에 이불을 널어두고 아래에 들어가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뼈대와 옷가지들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내 상상은 한계가 없어, 언제나 내가 만든 아지트보다 크고 흥미로웠다. 아지트의 위치와 형태와는 상관없이, 나는 나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내 유년시절은 내가 정의한 나의 공간 속에서 따뜻했다.
사실 내가 임의로 부여한 '나의 공간'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집에서 나의 공간은 없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형제와 같은 방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차 '나의 공간'이라는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다. 바쁘게 공부에 쫓기며 살다, 늦은 밤에 집에 돌아오면 모두가 잠든 어둠만이 존재했다. 집은 그저 다른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고양이 걸음을 하는 공간이거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잠을 청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다 타지의 대학교 기숙사에 가게 되었고, 난생처음 집을 떠난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기숙사를 닭장이라고 불렀는데, 겨우 누울 공간만이 주어진 2인 1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본 낯선 사람과 방을 함께 쓰면서, 나는 처음으로 '공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나의 첫 룸메이트는 잦은 술자리로 방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가끔 들어올 때면 취한 채 토사물 위로 엎드려 잠들거나,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오, 집에 가고 싶었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고 했던가. 나는 집을 떠나서야 집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주말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간다. 몇 달을 떠나서 있어도 익숙하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과 층수를 누른 후,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다녀왔습니다." 가족들은 말도 없이 오냐며 타박하듯 반긴다. 나는 집을 떠난 적 없는 것처럼, "넹넹넹~"하며 입고 온 옷가지를 정리한다. 익숙한 익숙함을 느끼고 싶어 더 태연하게 행동한다.
석조 건축물로 된 공간 자체는 아무런 성질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공간에 부여한 감정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나와의 공간은 내가 '공간'과 '사람'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도 기숙사 생활은 계속되었다. 마음이 맞는 룸메이트도 있었고, 맞지 않는 룸메이트도 있었다. 나는 점차 '나만의 공간'을 원하게 되었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방학 중 짧게 홀로 자취를 했다. 자취의 로망을 품기도 했으나, 단기로 빌린 집이라 그런지 뭘 시도할 수가 없었다. 대충 정리하고 보니 늦은 밤이 되었다. 잠을 자기 위해 얇은 이불 몇 조각을 바닥에 깔았다. 불을 끄고 천장을 보며 누웠다. 별다른 가재도구 없이 휑한 방. 혼자에겐 너무 넓은 방.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로 혼자가 된 공간에서, 혼자 청하는 잠은 추웠다.
다행히, 적응의 동물로 태어난 덕에 혼자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 경험 덕에, 직장을 구한 뒤 시작하게 된 자취 생활에서는, 좀 더 준비된 상태로 나만의 공간을 대면할 수 있었다. 비록 내 소유가 아닌 빌린 집인들 어떠하겠는가. 나는 나의 색으로 집을 채우고 싶었다. 주조색과 보조색, 강조색은 어떤 것으로 할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라니,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각종 가구와 전자기기들이 하나씩 택배로 도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간을 꾸민다. 비용을 더 들이더라도 디자인에 좀 더 신경 쓴 제품들을 선택하고, 밋밋한 반상보다는 액자 테이블로 소심한 포인트를 준다. 디자인적 감각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탓인지, 고민에 비해 멋진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은 내 마음으로 채운다. 이 정도면 좋아.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며 마음껏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콧노래 하며 흥얼거리기도 하고, 멍하니 유튜브를 보거나,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기도 한다. 큰맘 먹고 산 비싼 스피커로 노래를 들으며,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남들이 본 적 없는 가장 자유로운 모습으로 유영한다.
든든한 나만의 공간이 생기고 나니, 나는 욕심이 좀 더 생겼다. 집 밖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자영업자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인테리어가 좋지만 장사가 잘되지 않는 개인 카페를 좋아한다. 규모는 적당히 커야 하는데, 한 칸짜리 작은 카페는 시선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멍을 때린다. 그러다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카페 곳곳에 닿아 있는 사장님들의 취향을 느껴본다. 어떤 곳에 어떤 소품이 있는지, 조명의 색은 어떠하고 어디를 비추는지, 어떤 노래가 어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지, 어떤 마음이 이 공간에 깃들어 있는지 생각해본다. 또한, 카페에는 적당히 사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혼자는 너무 적막하고, 오래 있기에 눈치가 보인다. 나는 약간의 사람들이 만든 은은한 활기와 적당한 소속감 속에서 홀로 자유롭길 원한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면 완벽하다. 이런 카페들이 곧 망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건물 밖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찾아본다. 나는 산책로에 있는 벤치를 좋아한다. 따갑지 않은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 나무 벤치는 내 엉덩이를 유혹하는 마력이 있다. 적당한 온기를 머금은 나무 벤치에 앉아,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미동도 없이 있는다. 눈을 감고 햇살을 느낀다. 눈을 감으니 귀가 열린다.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 본래의 백색소음이 들려온다. 그러다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눈을 뜨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본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 나는 잔잔한 영화를 보듯 사람들과 경치를 구경하다가, 다시금 눈을 감는다.
나만의 공간에서 누리는 휴식은 달콤하다. 그러나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지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점차 함께하는 공간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연고 없는 타지에 홀로 떨어진 저 경력 초년생에게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상으로 '우리의 공간'이 필요하다.
<나와의 공간> 일화에서 말했듯이, 나는 '공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공간'에 '사람'을 더한 '우리의 공간'도 사랑하려 한다. '우리의 공간'은 '나만의 공간'에 비해 훨씬 유동적이다. '공간'보다 '사람'에 더 비중이 실린 의미라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는 곳은 '우리의 공간'이 된다. '우리의 공간'은 함께 떠들며 걸어가는 퇴근길이 될 수도, 담소를 나누는 복도일 수도, 친구와 가족의 집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맞는 좋은 사람들과 우리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물론 '우리의 공간'이 '나만의 공간'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나'가 없이 '우리'에게만 의지하게 된다면, 온전히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기 힘들다. 또한 각자의 시간은 각자의 공간에서 위로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라는 명목 하에 상대의 공간을 조심성 없이 넘어 다닌다면, 의도치 않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우리가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진정한 '우리의 공간'이다.
시간이 흐른 후의 나는, 어떤 사람들과 '우리의 공간'을 나누고 있을까? 그리고 퇴근 후 돌아온 '나만의 공간'은 나의 어떤 색들로 가득할까?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나와 우리가 편안한 곳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