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세우다
입사 초부터 나를 아끼는 상사가 있었다. 초면에 "너, 이 자식~" 하며 미소를 띠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는데, 사람과의 거리감을 천천히 좁혀가는 편인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내가 상사와 같은 성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식 혹은 개인적인 술자리에 나를 자주 불렀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나름 배울 점이 있는 상사였다. 맞지 않는 점이 더 많았지만 장점만을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그와의 만남이 불편해졌다. 상사는 나를 자신의 라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 각자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파벌과 상관없이 두루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상대 파벌의 단점만을 욕하는 상사의 언행이 불편했다. 이런 나의 불분명한 선긋기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저해하는 독이지만, 선을 분명하게 긋는 것이 나에겐 더 큰 스트레스였다.
어느 날, 큰 프로젝트를 두고 파벌 간의 의견이 나뉘었다. 나의 의견은 다수에 속했고, 상사의 파벌은 소수에 속했다. 그는 나에게 "잘 생각해라, 이거 안되면 우리는 끝이다"라며 정색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고, 결국은 그와 선택을 달리했다. 다음날부터 그가 나를 대하는 호칭이 바뀌었다. "이 자식"에서 "OO님"으로.
나는 당황했다. 겨우 한 번 의견이 갈렸다고 이렇게 티 낸다고? 물론 나도 마음속으로는 한참 전부터 상사와 선을 긋고 있었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태도의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이와 더불어 나는 나의 반응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상사와 이미 선을 그었다면서, 왜 상사의 냉랭함에 당황하는가? 자연스럽게 떨쳐냈으니 좋아해야 할 텐데?
생각을 거듭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바로 상사의 반응으로 인해, 나의 착각이 깨졌기 때문이다. 착각이란 바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주체'가 '나'라는 생각이다. 또한 '내 마음은 이미 너와 멀어졌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겉으로 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따위의 오만함이다. 결국 겉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단칼에 끊어낼 용기는 없으면서 관계의 주도성이 나에게 있었길 바라는, 티끌의 자존감을 건저 내길 바라는 자위이자 발악이었다. 상사의 선 밖으로 밀려난 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아프도록 실감했다. 물론 선 안에서도 편안하진 않았으니 일종의 성장통인 셈 치자. 지금은 멀어진 관계가 만족스럽다.
사실 나의 나약함에 관해선 이전부터 인식해 왔다. 나는 사람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렵고, 두려웠다. 그래서 나로부터 먼 곳까지 여러 선을 긋고, 하나씩 선을 넘어오는 사람을 차근차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는 내가 누군가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도 모르는 내가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있어서 '선을 긋다'는 의미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인 셈이다.
이런 방어 활동을 오랫동안 해 오니, 직감적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나와 맞지 않는 모습을 가진 상대를 빠르게 멀리할 수 있었다. 불편한 첫인상을 가진 사람은, 결국 그 불편함으로 나를 괴롭게 했다. 문제는 이런 선을 긋는 행위가, 좋은 사람도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내가 정한 선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람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금의 노력이 있었다면 만들 수 있었던 좋은 선후배, 동료, 연인 관계가 모두 멀어졌다. 나는 분명 나를 위해 선을 그었는데, 어느새 선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선이 나를 잡아먹었다.
문제점을 깨달았으면 고쳐 나가면 될 텐데, 곧바로 행동하기엔 나는 언제나 느린 학생이었다. 마치 책상 위로 그은 줄을 넘어오는 짝꿍의 팔꿈치처럼, 선을 넘는 일들은 너무나 쉽게 일어났고, 대처할 여유도 없이 피로만 커져갔다. 결국 나는 선을 긋는 것을 넘어 벽을 세웠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두렵고, 복잡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 벽으로 시야를 가렸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모르는 척 넘겨 빠르게 대화를 끝낸다. 고생하셨습니다 라는 말로 이르게 연락을 마무리한다.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을 다 꺼둔다. 휴식을 핑계로 바깥 생활의 비중을 줄인다.
나의 마음과는 별개로, 사회성은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괜찮은 척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애초에 내가 제일 잘하는 거짓말이 '괜찮아'니까. 하지만 벽을 세울수록, 사람들은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기 어렵고, 나는 점점 고립되었다. 벽은 하나둘씩 나를 둘러싸더니, 결국에 알이 되었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1919
좁고 어두운 알 속에서 회복의 시간을 가진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친구들의 연락을 대충 훑는다. 그러다가 한 번씩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들을 생각한다. 나를 달래 본다.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본다. 점점 나를 둘러싼 알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알에서 깨어날 시간인가 보다. 나의 답답한 세계를 깨부수고 나아가보자. 불사조가 알로 돌아가 태어나는 것처럼 다시 세계를 깨뜨려보자. 나는 항상 나를 가두고 깨며 성장해 왔으니, 모든 두려움과 외로움은 성장통에 불과하다.
다시 알을 깨고 세상을 마주할 때는, 선을 한 두 개쯤은 덜 그릴 용기가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