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의 용량

관계에도 복용법이 필요하다

by 그럴 때도 있지
2026년 첫 감기 몸살

감기 몸살이다.

기어이 이 겨울을,

찍고 넘어간다.


B형 간염 보균자인 나는

얼마 전부터 바이러스 수치가 올라

항바이러스제를 복용 중이다.


오랫동안 드나들던 동네 병원에

나의 진료 기록들이 쌓여 있어

의사는 간에 무리가 가지 않는 약을 지어준다.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자

의사는 말한다.

어차피 먹기 시작한 약에 대한 생각은

이제 잊어버리라고.

수치는 알아서 잘 조절될 테니

대신

내성이 생기는 것을

조심하라고.


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지방간의 유무이고

그 역시 콜레스테롤과 관련되어 있으며

호르몬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특히 폐경기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의 말을 듣다 보니

몸에 대한 설명이

어느새

삶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미 먹기 시작한 약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라’는 말에서 나는 집착을 떠올린다.


이미 지나온 시간,

이미 선택한 결정,

이미 끝나버린 것들에

미련을 두고

붙들고 있는 나를 본다.


모든 것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오라동 메밀밭

‘내성이 생기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에서는

관계의 거리를 본다.


자주 먹는 음식이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망치기도, 살리기도 하듯


자주 만나는 사람 역시

가깝고, 편하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서로를 잘 안다는

암묵적인 판단 속에서

더 쉽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내성이란 익숙함이다.

약의 효능이 떨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다른 약으로 바꾸어야 하거나

용량 조절이 필요한 상태.


관계도 다르지 않다.

서로를 향한 호기심과 설렘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아직 신뢰가 충분히 두텁지 않은 관계라면

그 익숙함은

안정이 아니라

균열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면

약을 복용할 때

규칙을 지키듯

관계에도

지켜야 할 선이 필요하다.


다 안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같을 거라

단정하지 말 것.

약을 먹는 텀처럼

적당한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할 것.


익숙함은

편안함이 아니라

늘 조심해서 살펴야 할

증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


으슬으슬. 약기운이 쉬이 떨어지는걸 보니

이번 감기는 오래 갈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