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의 사랑 이야기

농신

by 윤선태

부모의 근심과 탄생


새들도 새끼를 위해 벌레를 잡고

거지도 자식새끼 놀리느라 해지는 줄 모르는데

고대광실(高大廣室) 우리 부모 자식 없어 시름의 나날이라

영험하다는 절에 불공을 드려 자식 하나 얻으려 하네


귀가 얇아 애초 약속한 절을 마다하고

다른 절에 백 일 정성을 다하니

원래 약속한 절의 괘씸죄에 걸려

아들 아닌 딸 하나 점지했지요


열 달이 지나 아기를 낳으니 나는 딸 자청비

하녀도 몸을 푸니 아들 정수남

하늘나라 옥황궁 문곡성도 아들을 낳으니 문도령

우리 셋은 운명적으로 한날한시에 태어났지요



문도령을 만나 함께하다


그저 먹는 일에만 잽싼 정수남은 굼뜨고 게을렀지만

부모 사랑 듬뿍 받으며 자란 나는 예쁘고 건강했지요

열다섯 살 나던 해 베틀에 앉아 비단을 짜다가

빨랫감을 모아 우물가로 빨래를 갔지요


지나가던 문도령이 물 한 바가지 청하네요

힐끗 보니 상남자로 내 맘에 쏙 들어

물 한 바가지 가득 담아 갈댓잎 띄워 건네주었지요


검무선생한테로 공부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지도 않은 오빠를 핑계로 함께하려 했지요

외동딸로 태어나 제사에 축문이라도 쓰려면

여자도 공부 좀 해야 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겨우 승낙을 받고 남장으로 그와 동행했네요


한방에서 자고 한솥밥을 먹으며 작정한 삼 년

잠자리에 들 땐 물 대야를 가운데 두고

은젓가락 놋젓가락 걸쳐놓아 접근할 수 없게 했네요

덕분에 공부 잘하며 즐겁게 함께할 수 있었지요


어느덧 삼 년, 문도령이 결혼하기 위해 돌아간다네요

나를 몰라보는 그가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나도 그만 하산하기로 작심하고 함께 길을 나섰지요


돌아가는 길에 다다른 주천강 여울

삼 년간 묵은 때나 씻자며 미역을 감았네요

나는 조금 위쪽에서 시늉만 하다가

버들잎에 글을 써 마음을 전하고 집으로 향했지요


“눈치 없는 문도령아, 멍청한 문도령아

삼 년간 한방을 쓰고도 남녀 구별 못 한 문도령아”


그제야 알아챈 문도령이 허둥지둥 쫓아오네요

잘 달래어 부모님께 인사 올리며 소개하고

하룻밤 묶어 가는 것을 흔쾌히 허락받았지요



인연을 맺고 이별하다


첫날 밤, 내 부모 눈치가 보였나요?

결혼한 것이 아니라서 문도령이 접근하지 못하네요

깊은 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지요

그가 누운 이불에 쏙 들어가 참았던 사랑을 풀었지요


아침은 세워도 밝아오고

어둠의 장막을 쳐 막아도 밝아오는 법

날이 밝자 떠날 줄 알고 돌아올 날을 물었지요


문도령이 박 씨 하나 건네며 말하네요

박 씨를 심어 박이 익을 때까지는 돌아오겠다고

얼레빗을 반으로 꺾어 증표로 남기고 떠나가네요



정수남이를 죽였다 살리다


일상으로 돌아와 집안 살림을 맡았지요

모두가 열심인데 유독 정수남만 먹고 노네요

그를 꾸짖고 원하는 대로 마소를 줬으나

끌고 가 잠만 자다가 마소를 굶겨 죽이고 돌아왔네요


당연히 나무랐더니 문도령을 보았다고 둘러대네요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보았다는 곳에 함께 갔지요

산속에서 정수남의 엉큼한 마음을 눈치채고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에야 겨우 달래 내 무릎을 베고 잠들게 하고

나뭇가지로 꼬챙이를 만들어 귀속을 폭 찌르니

피를 흘리며 구름 흩어지듯 죽고 마네요


정수남을 죽였다고 하니 부모님은 펄쩍 뛰었지요

그가 하던 일을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쫓아내네요

용서받을 방법은 그를 살려내는 것

어쩔 수 없이 환생 꽃을 찾아 나섰지요

고생 끝에 얻은 환생 꽃 다섯 송이로 그를 살려냈지요


정수남과 같이 집에 돌아왔더니 부모님은

사람을 죽였다 살리는 내가 요망스럽다며 다시 쫓아내네요

떠돌다가 베 짜는 할머니에게 몸을 의탁했지요

비단을 짜며 그것이 문도령 결혼 예물이라는 걸 알고

“가련하다 자청비, 불쌍하다 자청비” 글자를 새겨놓았네요


그 글자를 본 문도령이 밤에 찾아왔네요

반갑고 얄미워 바늘로 손가락 끝을 살짝 찔렀지요

따끔하며 피 한 방울 꽃잎처럼 맺히자

놀란 그가 화가 나 그냥 돌아가네요



재회와 결혼 조건


막막했지만 문도령을 찾아 나섰지요

물동이를 앞에 놓고 우는 선녀들을 만났네요

문도령이 나와 미역 감던 물을 떠 오라 했는데

그 물이 어디 있는지 몰라 울고 있다네요


물을 찾아주면 함께 하늘에 오르기로 약속하고

하늘에 올라 그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나를 못 잊어 배회하는 그에게 다가갔지요


아, 재회!

만단정회(萬端情懷)를 나누고 나니

그가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네요


“새 옷이 따뜻한가요, 묶은 옷이 따뜻한가요?

새로 만든 장이 단가요, 묵은장이 단가요?

새 사람이 좋은가요, 묵은 사람이 좋은가요?”


지난 일을 얘기하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니

그의 부모님은 결혼 조건을 걸고 허락하네요

쉰 자 구덩이에 숯 쉰 섬을 넣어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시퍼런 칼날이 선 다리를 놓아

맨발로 칼날을 밟고 건너와야 며느리 자격이 있답니다


통과의례를 단단히 치렀지요

문도령은 말렸지만, 옥황상제님께 기도하고

칼날 위를 맨발로 사뿐사뿐 춤추며 걸어 건넜답니다



변란을 평정하고 농신이 되다


마침내 결혼을 허락하네요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이 자자한데

하늘에 난이 일어 문도령이 선봉에 서게 되었지요


내가 나서서 수리멸망악심꽃으로 난을 평정했더니

옥황상제님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네요

하여 이승에 필요한 곡식의 씨앗을 달라고 했지요


그런 이유로 문도령은 상세경 큰 농신

나는 중세경 작은 농신

정수남은 하세경 목축신이 되었답니다



<주> 농신이란 농사 일을 주관하는 신이다. 세경신이라고도 한다. 상세경 큰 농신으로 문도령이 맡았고, 중세경은 작은 농신으로 자청비가 맡았다. 하세경은 정수남이 차지했는데 이는 목축신이다. 자청비와 문도령의 사랑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는 신화이다.

keyword
이전 15화꽃의 이름으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