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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라면 한 그릇

by 다시

금요일 오후. 아들과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난밤 아프다며 울면서 깨고 잠들기를 여러 번 했는데 이유를 찾았다.

어금니가 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팠던 거야?

-아침에는 괜찮았는데 점심 먹은 후부터 전기 충격이 온 것처럼 아팠어.

-그래? 한 번 보자.

눈을 감고 입을 한껏 벌리는 아이가 너무 귀여웠지만 일단 살펴보니 도톰하게 오른 잇몸 사이에서 삐죽이 어금니가 보였다. 머리를 만져보니 열도 살짝 있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왔다. 얼얼한 잇몸이 잠시라도 시원하라고 쮸쮸바 하나 사주니 헤실하게 웃는다.

저녁을 먹기까지 아직 두어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 허기가 돌았다.


요즘 들어 배가 자주 고프다. 1학년은 11시 30분에 점심을 먹는다. 웬일인지 조리사님들은 반찬은 많이 주시지만 밥은 약간 모자라게 주신다. 더 달라는 말을 하기 민망하여, 그냥 주시는 대로 받아 들고, 반찬과 국물까지 거의 남김없이 먹는다. 그러면 4-5시까지는 든든하다. 그러다가 5시부터 배가 고프다.


아이들이 쭈쭈바를 먹는 동안 아몬드도 몇 개 집어 먹고, 딸내미가 좋아하는 육포가 배송되었길래 그것도 한 봉지 까먹었다.

배가 차지 않았다.

불금인데 저녁은 시켜 먹을까 물어보니 아이들은 라면을 먹겠다고 한다. 라면보단 치킨이나 족발이 당기는 터라 남편 오면 물어보고 시킬 작정이었다.


씻고 나오니 남편이 와서, 저녁은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 먹자고 말했다. 영화 보면서 먹는 치킨도 좋아서, 저녁은 짜장라면을 먹자고 했다. 남편이 자신이 끓인다고 하기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어금니 때문인지, 잠투정인지 아들도 나와 비슷하게 저녁잠이 설핏 들었다가 깼다. 찡찡거리는 소리에 나도 일어났다.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보다 라면 냄새에 끌려 밖으로 나가니 남편이 자기 것 한 그릇, 딸내미 라면 한 그릇 끓여서 먹고 있었다.

지난 주말, 시어머니가 담그신 파김치와 물이 가득한 한강 라면을 먹고 있는 꼴에 에 부아가 났다.

내껀 어디 있지?


일단 화를 누르고, 아들 곁에 갔다. 머리를 짚어보니 열이 있는 것 같아 체온계로 열을 재보니 정상 체온이었다. 자다 일어난 아들은 심통을 부리려는 얼굴이었다가 엄마의 싸늘한 표정에 알아서 씻으러 갔다.


아들 라면 끓일 냄비를 올리고, 남편이 자기 라면 끓인 후 싱크대에 냄비를 넣어버려서 내 냄비는 새로 꺼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보고 있는데, 후루룩 쩝쩝 소리만 가득하다.

한번 먹어보라는 소리도, 라면 먹을래? 끓여줄까?라는 소리도 없이 자기 입에 라면을 밀어 넣는 그 꼴이 못마땅했다.


-내껀 왜 안 끓였어?

-어? 아까 잔다도 안 먹는다고 했잖아?

-내가? 나 그런 기억 없는데. 내가 오늘 배고프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자는 것 같아서 불 끄고 나왔어. 일부러 안 깨웠는데.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지. 내가 짜장라면 먹고 싶다고 했잖아.

-또 왜 그러는데.


또 왜 그러는데? 또 왜그러는데????

나는 배가 고팠을 뿐이다.

턱턱 냄비를 놓고 라면을 부숴 넣는데 내 영혼이 짝짝 갈라져버렸다.

내가 저희들을 위해 저녁마다 동동거려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식사를 만들었던 것은 당연하고

자고 있는 사람에게 밥 먹을 거야? 한번 물어보는 것을 안 한 것이 서운했다.


-한번 더 물어보지. 나 진짜 배고팠어.

-또 그런다.


남편은 내 짜증을 읽었다. 짜증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아내의 배고픔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을 만큼 먹었는지 일어나길래 자리를 잡고 짜장 라면을 먹었다.

김치를 꺼낼 기분도 아니어서 그냥 먹는 짜장 라면은 덜 익었고, 물이 너무 많았다.

앞에서 자기 몫의 라면을 먹는 아들은 뭔가 쎄함을 느꼈는지 바른 자세로 밥을 먹는다.


-**이가 밥 안 먹고 자면 어떻게 해? 일어나서 밥 먹으라고 여러 번 깨우고 밥도 차려 놓지?

나는 **이 아빠가 혼자 삐져서 밥 안 먹고 방에 들어가도 애들 시켜서 밥 먹으라고 꼭 말했어.

먹을 걸로 치사하게 굴기 싫어서.

그런데 나한테 밥 먹으라는 말 한 번 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내가 배가 고팠다고 했잖아. 내 거를 못 끓여 놨으면, 내가 나왔을 때 물어라도 봤어?

자기 먹을 거 그냥 먹고 있었잖아? 내 태도가 별로야?

내가 언제 너희들 밥 안 해줬어?

근데 내 밥은 없어?

왜 나는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 11시 반에 밥 먹을 때 안 오는 애들 데리러 가고, 애들 급식 지도하고, 챙겨주느라 제대로 밥 먹은 적이 없어. 내가 왜 배가 고프겠어!


먹던 라면을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 버리고 한바탕 가시 돋친 말을 쏴버렸다.

가시 박힌 말을 어디론가 날아가 남편의 마음에도 박히고, 아이들 마음에도 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가장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말로 꺼내 놓기 전엔 그러려니 했다.

내 밥이 없어도 그냥 끓여 먹으면 그만이고, 그도 아니면 시켜 먹으면 그만이었다.

고작 라면 한 그릇에 화창하고 설레던 마음에 불이 났다.

위에 쓴 말보다 훨씬 더 거칠고 모난 말들을 쏟아내니 이번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엄마가 해준 밥 한 끼가 그리웠다.

우리 엄마의 슴슴하게 익은 배추김치가 더 그리웠다.

집밥보다 바깥에서 친구랑, 애인이랑 먹었던 밥이 더 맛났던 그 시절에 무심코 놓쳐 버렸던 엄마의 밥상이 너무너무 그리웠다. 우리 엄마는 내가 배가 고프다고 했으면 고슬고슬 새 밥에 새콤하게 무친 봄나물을 꺼내주면서도 차린 게 없다며 미안해했었다.

라면이 진짜 먹고 싶어서 그랬을까?

나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는 그 마음이 고팠나 보다.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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