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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라는 미신

우주가 인간을 위한 곳으로 설계되었다는 생각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경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 전부터 전 세계의 수많은 신화에 등장해왔다. 기원전 2000년에 작성된 한 이집트 문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은 인간을 위해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도교 철학자인 열자는 똑같은 생각을 어느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하늘은 다섯 가지 곡식을 자라게 하고 지느러미가 달린 무리와 깃털이 달린 무리를 낳는다.” 유일신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전통 그리고 인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며 우주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진공의 에너지밀도를 나타내는 우주상수는 10의 120승 정도지만 이는 양자역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값보다 매우 작다. 이에 대하여 인류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우주상수 값이 지적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1973년 브랜던 카터(Brandon Carter)에 의해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가 우주론에 등장했다. 태양의 나이 50억년, 지구의 나이 45억년을 고려할 때 인간 같은 고등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은 수십억 년이 걸리며, 이 과정에는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어려운 단계(hard steps)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생명의 탄생, 복잡한 세포의 발달, 고등 지능을 가진 존재의 등장을 위해서는 희귀한 진화적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우주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인간 같은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인류원리가 우주론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했다.


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했는지 궁금해 하지 않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도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에 주어진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풀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스티븐 호킹은 빅뱅 깊은 곳에 내재된 수학으로 우주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를 설명할 ‘최종 이론’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스티븐 호킹은 인류원리를 폐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과학적 원리로 우주론을 반증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과학의 기본원리에 집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인류원리에 전통적 물리학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인류원리는 이론물리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명 그리고 인간 친화적인 특성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 영역을 넘어선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24년 인류원리는 과학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우주팽창설과 암흑물질 존재 등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우주의 비밀이 조만간 규명될 것으로 예상되면서이다. 예를 들어 우주팽창은 초기 우주가 극도로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팽창한 사건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류원리와 달리 현재의 우주가 우주팽창에 의한 자연스러운 물리적 과정에서 비롯됐다. 인류 원리를 검증하기 위한 조건들은 가까운 미래에 실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우주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2025년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은 지적 존재의 진화는 의외로 쉽게 발생할 수 있다. 지구상 인간과 생명체는 우주와 행성의 진화에 이은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이다. 인간이 우주에서 유일한 지적 존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구 초기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점차 생명을 허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서 진화가 일어났다. 광합성 미생물과 박테리아를 통하여 지구에 산소가 많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핵세포의 발생과 진화는 단 한 번 일어났다고 알려졌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어 독립적으로 진화했지만 화석 기록에 남지 않았거나 환경이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진화는 행성의 조건이 허용하는 대로 전개되는 예측 가능한 과정이다. 이러한 모델은 다른 행성에도 적용돼 인간과 유사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복잡한 생명체의 진화는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인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adv.ads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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