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필맥, 2009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왜 누군가는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도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인데, 그가 제시한 문제 제기는 종래의 마르크스를 포함한 다른 이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과도한 노동을 문제시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프롤레타리아가 겪는 비참함은 모두 다 노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우선 라파르그가 파악한 당시 노동 상황의 실태를 살펴보자. 인간이 노동할 수 있음은 신성한 권리라며 공장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도 노동자가 되어 12시간이나 14시간 동안이나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이상적인 교정 시설”로 잡았다. 하루에 14시간 노동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면 바로 잠을 자야 겨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죽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식사만 섭취하고, 필요한 만큼만 잠을 잔다. 여가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하는 종속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으를 권리’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노동의 권리에 반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노동할 때가 아니라 노동하지 않을 때에 있음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다르게 말하면, 게으를 권리란 주체적 삶의 동의어나 다름없다.
라파르그는 현시대가 과잉노동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14시간이라는 과잉노동은 노동자, 부르주아, 사회 중 어디에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해악만 끼칠 뿐이라며 그는 과잉노동의 문제점을 차례차례로 지적한다. 이때 과잉노동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에 관한 그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과잉노동은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과잉생산이라는 부작용이 초래하는 혼란을 겪는다. 이를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산업공황이다. “낮이 찾아오면 밤이 찾아오듯 과도한 노동의 시기가 지나 산업공황이 도래하여 해고와 빈곤이 끝없이 계속되면 필연적으로 파산이 따라온다. 신용으로 자금을 끌어 쓸 수 있는 한 제조업자들은 일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을 준다. 그들은 자금을 거듭 차입해서 노동자들에게 원자재를 사다 주고, 시장에 상품이 넘쳐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생산을 계속한다. 상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음 만기일은 찾아온다. 자금이 고갈된 제조업자는 사색이 되어 은행가를 찾아가서 가문과 명예를 팔아가며 그의 바지춤에 매달린다.”
한편,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은 자본가에게도 이득 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12시간과 14시간 노동 속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자의 역할은 담당하지만, 소비자의 역할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살 사람은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비생산자이자 과소비자라는 이중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자신들의 소박했던 취향을 저버리고” 사치와 과소비의 늪에 스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어떻게든 돈을 써야만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라파르그는 자본가계급이 스스로에게 부도덕이라는 의무를 부과했다는 재미난 표현으로, 부르주아의 과소비 성향을 조롱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과잉노동의 문제점으로, 생산 기술 발전의 저하를 든다.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할 사람이 차고 넘쳤기에 자본가는 장비 생산으로의 인센티브가 떨어진다. 반대로, “인건비가 상승하면 자본가는 저렴한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과잉노동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 심지어는 가장 수혜를 보는 것 같았던 부르주아에게도 비합리적인 바보짓에 불과하다.
<게으를 권리>의 4장 ‘새로운 가락에는 새로운 노랫말을’은 전체 결론이자 그의 해결책이 나온다.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자의 소비력 증진을 주장한다. 이때 소비력 증진이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얘기한 것이리라. 최소한의 노동만 하며, 자기가 번 돈으로 노동만 하는 기계적 삶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게으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할 권리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나 비참해질 권리에 불과한 '일할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누구에게도 1일 3시간 이상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면 지구는 이 오래된 지구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는 개벽의 기쁨으로 몸을 떨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노동에 대한 폴 라파르그의 이러한 통찰은,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일대의 변화를 바라볼 수도 있는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아카넷, 2020)에서 김재희는 스티글레르 등을 인용하며 ‘포스트 노동 사회’로 나아갈 것은 주장한다. 스티글레르는 고용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을 노동에 예속되고 진정한 ‘일’(노동이 아니다)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비판하며, 고용을 폐지하여 인간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기본소득 논의와 연결하면, 스티글레르는 노동생산물이 아닌 ‘일’을 중심으로 부를 분배하는 기여 소득을 주장하였는데, 결론적으로 포스트노동 사회란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여 일을 하고, 그 ‘일’만큼 소득을 받는다. 폴 라파르그는 인간이 억압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최소한의 일만 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정말 앞에서 말한 포스트 노동 사회가 다가온다면, 이는 라파르그의 이상이 현실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가오는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 게으르게 생활할 수 있는 사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