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독교 지배 아래의 세상

톰 홀랜드, 이종인 옮김, <도미니언>, 책과함께, 2020

by Redman
WPUPSLMEJJ7JRCSYEOPHSJ3MOE.jpg

고대 아테네부터 미투 운동까지. 톰 홀랜드의 <도미니언>은 기독교의 발흥과 확산, 그리고 서구인들의 의식 세계 속에서 빠질 수 없게 된 기독교적 가치의 역사를 다룬다. 2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고, 각 장에는 ‘그림자’ ‘성령’ 등의 표제가 붙어있는데, 저자의 논지를 잘 따라가면서 표제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사람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 책을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이다. 원서의 부제도 “The Making of the Western Mind”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기독교가 서양, 정확히는 서유럽(동유럽과 정교회는 다루지 않았다)에 미친 영향력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제목인 ‘도미니언’은 지배권이라는 뜻으로, 기독교가 서유럽인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해온 역사를 한 단어로 축약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고 주장했고 대니얼 윌리엄스는 서양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했는데, 오늘날 서구의 가치관은 기독교의 주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구가 기독교 세계가 되기까지는 4개의 혁명을 나열할 수 있다(내가 임의로 나눠본 것이다). 첫 번째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바울이 설파한 혁명이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16, 공동번역, 성서 인용은 이 책의 번역을 따라 공동번역을 인용).”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복음 22:39, 공동번역).” 로마인들이 다 기피하는(심지어는 유대인도)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받은 예수님의 전복적 지혜와 가르침의 불은 꺼지지 않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퍼져나갔고, 그중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복음이 그레코-로만 지역에 자리 잡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 기독교는, 켈수스 같은 기독교의 비판자들이 공박한 것처럼 하층민들이 다수였고, 인육을 먹는다는 등의 루머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 하층민의 종교는 그들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고 자선과 이웃사랑을 실천에 옮기며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 나갔고, 300년쯤 가면 황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특히 이 자선 행위는 로마 사회에서 구별되는 그들만의 특징이었다. 약자를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가르침은 로마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볼 수 없었다(194p). 자선과 약자 사랑은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정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2의 혁명은 11세기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 진행된 교회 개혁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당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권력으로부터의 교회 독립을 추구했던 인물이다(11세기 교회 개혁을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는 김봉수, <페르투르 다미아니와 중세의 교회개혁운동> 참조). 그는 “교황청의 영향력 범위가 온 세상에 미치는 보편적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전임자 누구보다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성을 확신하였는데, 이때부터 성과 속/교회와 국가의 구분이 영구적으로 “서구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개혁과 성과 속의 이분은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헌신해야만 하는 교회 조직을 탄생시킨 것이다. 세 번째 혁명이자 마틴 루터가 그 기를 들어 올린 종교개혁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이 만든 교회 조직을 부정하고, 교황청이 제정한 교회법보다 우위에 있는 양심의 법과 값없는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구원을 주창하였다. 여기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성령이었다. 루터의 도전은, 다양한 기독교인 집단들이 “성령을 내세우면서...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불을 붙였다. 성령에 의지한 권위에 대한 “항의의 연쇄작용” 속에서 성령의 영감을 성경보다 중시한 퀘이커교도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빛’을 내세웠고, 스피노자도 이러한 성령에 의한 권위 파괴 전통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비록 그는 성령이 아닌 이성의 빛을 주장했지만).


니체가 선언한 ‘신 죽음’의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다. 강력한 기독교의 비판자였던 니체는 그 누구보다도 당시 사람들의 마인드에 깊게 뿌리박은 기독교의 지배력을 인지하였다. 그래서 망치를 들어 기독교라는 기둥을 붕괴시키려 하였고 ‘신은 죽었다...우리가 그를 죽였다.’라는 말은 기독교적 가치관의 붕괴를 선언한 것이기도 하였다. “인간의 존엄성, 노동의 존엄성” 등 “기독교 도덕성에 매달리는 자들을” 니체는 경멸하였고, 그 근원지인 신을 죽임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니체의 혁명과 더불어 과학 지식의 진보는 기독교에 치명적이었다. 갈릴레이와 뉴턴 시대까지 신앙과 과학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나, 진화론과 지질학의 발전으로 기독교 신앙의 신빙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서구를 기준으로 봤을 때, 기독교의 영향력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1세기로 넘어와서는 기독교는 급진적 아젠다에서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톰 홀랜드의 주장처럼, 기독교가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서구인의 가치 세계, 문화, 심지어는 기독교 비판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리와 용어마저 기독교에서 나올 만큼, 기독교는 무의식의 저편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비단 서양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현대 아프리카, 특히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19세기 인도에서도, 로이가 타락한 힌두교와 진정한 힌두교를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논리 이면에는 힌두교가 아닌 전통적인 개신교의 ‘성/속’의 신념이 있었다. 또한,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분제를 뛰어넘어 양반과 노비가 교류하게 만든 천주교 전복적 가르침은 조정을 긴장케 하였고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약 100년 뒤 개신교가 들어온 뒤에는 온건적 복음주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문화 곳곳에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흔적이 남기 시작했고 그 초기 결실이 평양대부흥이다. 기독교는 전파되는 곳마다 그 사회를 가만히 놔두지 않으며, 어떠한 식으로든 자기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기독교를 그 뿌리채 제거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이제와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오늘날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느 정도라도 공유하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기독교의 모순도 여전하며, 기독교를 둘러싼 극단적인 갈등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모순과 갈등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강하게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의 영향력 회복’이 주요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기독교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을 놀라게 하고 변혁시키는 생명력을 보여줄 것인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세계로 만들고 기독교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할 때,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식의 유치한 사유 말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는,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스스로 궁리해보고 같이 토론해볼 문제일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읽었으면 좋겠다.


여담: 역자 이종인 선생님의 ‘옮긴이의 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종인 선생님은 본서 맨 첫 페이지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 니체, 비틀즈의 말을 각각 ‘모순’·‘갈등’·‘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고, 이 3개의 핵심 단어를 바탕으로 본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정리해주고 있다. 이 글은 방대한 내용의 본서를 읽을 때 매우 참고가 되니, 다른 독자들도 먼저 옮긴이의 글을 읽은 뒤에 본문으로 들어가면 방대한 내용에도 길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책 추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의 역사>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와 바트 어만의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를 함께 추천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게으름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