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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민주주의 공식을 넘어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7 (초판 3쇄)

by Re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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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뒤에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투표율이다. 투표율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사람들은 대중의 ‘깨어 있는 시민 의식’을 찬양하거나, ‘무지몽매한 대중’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인식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자기를 다스릴 지도자를 본인의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은 참정권의 핵심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한 시민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수단이다. 또한, 민심을 대변함으로써만 통치의 정통성과 적법성을 인정받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부도 그 민의의 표출로서의 선거를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라는 말에서 그 민주주의는 우선, 직접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제 민주주의임을 알 수 있다. 다수의 대중은 자신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수 있는 인물에게 표를 주어 지도자로 삼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거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후보는 ‘국민의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시장, 국회의원,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민심의 표출’이라든지 ‘국민의 선택’이라든지 하는 단어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선거가 성립되어서 ‘민심 대표’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오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의미한 투표율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해봐야 할 점은 ‘유의미한 투표율’, 가령 50~70% 이상의 투표율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민심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선거율이 70%가 나왔다고 하자. 그렇다면 투표하지 않은(혹은 못한) 30%의 의견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설령 모든 국민이 다 한 표를 행사했고, 그래서 대표가 선출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대표성’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낙선한 후보자에게 던져 유효투표임에도 당선자 결정에 구실을 하지 못한 사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게다가 현실에서는 100%는커녕, 선거율이 70%를 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국민의 선택’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국민’의 범위가 협소해진다. 대의제 정부의 핵심은 대표가능성에 있는데, 결국 대의제가 대표하는 것은 ‘선거에 나와 표를 던진 사람 중에서도 당선자를 지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거권이 만 19세 이상의 성인에게만 주어진 한국에서, 정부와 정치인이 말하는 ‘대표’란 만 19세 이하 청소년의 의견은 전적으로 배제된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대변해줄 수 있는 후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표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다른 후보에게 표를 준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충분히 의견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가? 대의제의 대표는 무엇을 근거로 ‘대표’를 자칭할 수 있는 것일까?



서평인 주제에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어쨌든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도식이 따지고 들어가보면 상당히 근거가 빈약한 도식임을 전달하고 싶었다.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해서 쓰인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대의 정부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 더 구체적으로 말해 “대표가 선출되고 공공 결정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관리하는 제도(16p)”를 밝히는 데에 있다. 마넹은 글의 서론에서부터 “현대의 민주주의 정부는 그 설립자들이 민주주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정치 체제로부터 발전(13p)”했다고 못을 박는다. ‘선거’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이지만, 사실 선거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미국의 독립 이전까지 귀족정과 상통하는 개념이었다. 반대로 민주정의 핵심 요소로 여겨진 것은 ‘추첨’이었다. 16세기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추첨과 민주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선거와 귀족정을 밀접히 연관”시키고 “민주정이 추첨과, 그리고 귀족정이 선거와 어울린다는 것을 하나의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으로 상정했다(97p).” 18세기의 정치사상가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추첨과 민주정을, 선거와 귀족정을 연결시킨다(100p).” ‘추첨=민주주의/선거=귀족정’의 등식은 우리의 일반적인 민주주의 통념과 완전히 상치된다. 특히, 직접 민주주의와 추첨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고대 아테네의 역사적 사례를 떠올려 볼 때, 추첨은 ‘중우정치’로 가는 길로 느껴진다. 그러나 마넹은 이렇게 반문한다. “왜 우리는 추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 부르는 것일까(24p)?”



아테네 민주정은 “교체의 원칙”을 매우 중시하였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46p).” 통치자가 피통치자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는 이전에 한때 그 반대뇌는 위치에 있어 보았다는 데서 비롯된다(47p).” 아테네가 이렇게 교체의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 데에는, 아테네 민주정의 최고 이상이 “보울로메노스(ho boulomenos)”, 즉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료 시민에게 건의할 수 있다는 원칙,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는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울로메노스의 원칙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최적의 수단이 추첨이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 직접성은 행정관, 평의회나 법정 등 통치 기관의 “구성원들을 충원하는 추첨이라는 방법(42p)”에서 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직접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오해와 달리 전체 ‘국민의 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수’의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그 함의를 해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추첨을 통해 지명된 이름은 오직 자원한 사람의 이름(50p)”이었다는 것이다. 추첨기계에 이름이 들어가는 사람은 행정관에 선출되기를 자원하는 사람뿐이었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평등하게’ 선출될 수 있는 “교체의 원칙”과 “자발성의 원칙”이 결합한 형태가 아테네 민주정인 것이다.



그러나 “관직 배정에 있어서 평등에 대한 고려(120p)”는 17~18세기 “동의의 원칙”이 더 우선시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테네인이 그토록 중시한 “교체의 원칙”은 참조 사항 정도로 밀려난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선거가 고려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표는 자신을 선출한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더 뛰어나야만 한다는 대의 정부의 또 다른 불평등한 특징이 서서히 도입되었다(125p).” 우월성의 근거가 재산이든 덕성이든, 대표는 무조건 유권자보다 우월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메디슨 등의 연방주의자들은 대표와 선거인 사이의 비동일성을 당연하게 여겼다. 매디슨은 “대의 정부를, 광대한 국가에서 시민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술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민에 의한 정부의 유사 형태로 보지 않았다...대의 정부에서는 ‘선택된 시민 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되는 효과를 가진다(14~15쪽).’”라고 말했다. 즉, 대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불가피하게 고안된 대안이 아니다. 선거자와 피선거자 사이의 비동일성과 대표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는 선거의 원칙은 귀족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선거의 어떤 부분이 귀족주의적일까? 이것이 본서 제4장의 내용이다. 첫 번째는 편파성이다. 이는 다시 (1) 공직 진출의 가능성이 일부에게 편중되어 있음, (2) 선거 과정 중 후보자들에 대한 편파적 대우와 평가로 나눌 수 있다. 둘째, 탁월성의 원칙이다. “선거는 한 차원에서든 다른 차원에서든, 나머지 주민들, 즉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과, 후보들에 대한 선택(177p)”이다. 셋째, “두드러진 자극”이다. 한 마디로, 얌전한 후보보다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많이 해도 튀는 놈한테 더 관심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보 선전 비용”이다. 개인 홀로 선거 비용과 선거 운동에 드는 비용을 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로써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선거 원칙은 진정 정치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선출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라는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몸소 느끼는 진리이다(184p).



마지막 6장 “대의 정부의 변형들”에서 마넹은 대의제의 형태를 ‘의회 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라고 분류하는데, 이중 청중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와 밀접하다고 느껴, 이를 더 집중적으로 보겠다. 대의제도에서 통치자의 결정과 유권자의 정책 선호 사이에는 크게 (1)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 (2) ‘(반복적) 선거’, (3) ‘여론의 자유’, (4) ‘토론에 의한 평결’이라는 4가지 요소가 작용하는데(5장), 차례대로 살펴보자. 먼저 (1) 청중 민주주의하에서 “대표들은 일반적으로 이미지, 즉 후보의 개인적 이미지와 그들이 속한 조직이나 당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선출(274)”되는데, 이렇게 되면 “선거 운동은 하나의 ‘적대적’ 과정, 즉 서로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과정”이 돼버리고 만다. 게다가 (2) 유권자는 매 선거에서 제시되는 선거 공약에 단순히 “응답”하고 “반응”하는 존재가 된다. 주도권은 정치인에게 속한다. 이것이 (1)과 연결되면, 유권자는 정치인이 제시하는 선택의 항목과 분열선에 ‘반응’하여 적과 아군을 구분 짓는 “일종의 청중으로 나타난다(270p).” 따라서 대표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더 커진다. 여기에 (3) 상업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여론 조사 기관도 가세한다. (4) 특정 쟁점에 대한 미디어 매체에서의 활발한 토론은 유동적 지지자층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정책을 제안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민주정적 요소도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 요소가 더 강한 “귀족적 민주정”이라는 혼합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테네의 민주정이 시민의 참정과 발언의 자유를 최대한 평등하게 보장하려 노력했다면, 대의제하에서 대중은 대표에 주도권을 넘기며 단순히 반응하는 청중의 역할에 머물러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 두 원칙, 교체의 원칙과 자발성의 원칙을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실제 권력이 아닌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수학적) 확률(59p)”을 추첨을 통해 동등하게 배분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은 안 했지만, 아테네에서 ‘시민’의 범위는, 여성과 노예를 제외한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발언의 평등을 신경 썼던 아테네서조차 배제되고 소리 내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가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소리 내지 못하는 이들을 찾고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드는 데에 ‘대의제를 벗어난 민주주의’의 핵심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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