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그린비 ‘개념어 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많이 알다시피, 현행 대한민국 헌법 체제는 1987년 6월 항쟁 및 그때까지의 민주화 투쟁의 산물로서 탄생한 것으로, 흔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보다는 권위주의의 잔재인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혐오 발언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차별적 언사들이 ‘자유’·‘역차별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대의제하에서 누구도 대변해주지 못하는 소수자의 목소리와 소수성의 문제들. 이것들에 대하여 민주주의는 배제 이외의 답을 줄 수 있을까? 사실, 더 근본적으로 ‘민주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우리는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촛불 혁명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지금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의 번역어로서 민주주의는 부적절한 번역이다. ‘~주의(主義)’라고 번역되는 다른 단어들은 영어에서는 접미사 ‘~ism’이 붙는데, 이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민주주의(民主主義)’는 ‘democracy’ ‘demokratia’로 어떠한 사상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데모크라티아’에 대한 번역으로 ‘민주정’도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고대 그리스어로 정치체제를 지칭하는 말에는 ‘아르케(근거, 지배, 관장하는 직무라는 뜻)’가 붙기 때문이다(군주정-monarchy/과두정-oligarchy).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아르케는 ‘아나르코스’ 즉 ‘아르케 없음’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아르케’가 없는 대신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가 붙어 있다(17p).” 아르케와 크라토스의 차이는, 아르케 그룹에서는 누가 지배자인지가 명백하고 정체는 지배자의 숫자로 나타난다. 아르케가 없다는 것은, 그 반대라는 의미이다. 지배자의 형상도 없고 지배자의 숫자도 의미가 없다. 민주주의에 ‘힘’이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된 것은, “어떤 일을 해낼 능력 내지 역량에 주목한 명명인 셈이다.” “‘데모크라티아’는 혁명의 순간에 데모스의 자기 권리주장과 더불어 출현한 정체였다. 이처럼 ‘데모크라티아’는 어떤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집합적 신체로서 데모스가 가진 역량이다(20p).” 민주주의는 지배와 지배자가 없다.
또한, 민주주의에는 통치의 근거가 없다. 여기서 근거를 기준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참을 수 없던 점도 바로 이것이리라. 플라톤에게 있어, 피통치자와 통치자 및 통치에 필요한 모든 유의미한 분별과 척도와 기준을 폐지하는 민주주의는 잡탕 덩어리며 혼돈의 도가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란 기존에 당연시되었던 기준과 근거가 사실은 ‘근거 없음’임을 폭로하며 “척도 자체를” 바꾸어 내는 일이다.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통치의 근거는 다수결의 원칙이다. 존 S. 밀은 이를 두고 ‘다수의 횡포’이라고 불렀는데, 대의제 정부에서 ‘대표’는 기실 선거에 참여한 이들 중 당선자에게 표를 던진 이들만을 대표한다(여기에 선거권이 없는 이들은 애당초 고려되지도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대의제는 민심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이는 대부분 근거가 없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후지이 타케시(藤井たけし)는 시위와 한국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거듭 소환되는 ‘국민’에 의문을 표한다(<무명의 말들>, 포도밭). 타케시의 문제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국민’과 ‘인민주권’이 한 나라 안에 있는 수많은 주체를 포괄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제2장도 바로 이러한 지점과 맞닿아있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여기는 ‘인민주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적 이해”에서 기인한 것으로, 16세기 이후에나 나온 ‘상상된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부분과 관련해서는,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3장 참조) 홉스나 루소 등의 “근대 사상가들은 주권의 초월성보다는 주권을 통한 통일성 내지 단일성에 관심이 많았다(56p).” 홉스에게 있어 군주는 “공동체를 통일시키는 강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주권자가 될 수 있고, 온갖 이질적인 주체들이 섞인 “다중은 다지 다중이라는 사실, 즉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주권을 표상할 수가 없다(57p).” 따라서 다중은 ‘국민(인민)’이라는 가상적 통일체가 됨으로써 대표들에 의해 대의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선거 제도가 이 시기에 중요해진 것도, 대의제가 가지는 귀족주의적 성격과 더불어, 인민주권이 가지는 이중 허구성, 즉 “모두를 동질적인 한 집단으로 간주하는 허구와 개인들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통약가능하다는 허구(73p)”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성을 거세하고 하나의 허구적인 동질 집단을 만든 순수성으로 국민국가가 출발하였기에, 국민국가는 국민이 아닌 것들, 다른 말로 “대표(표상)불가능한 것”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제거해버리거나 동화시켜 버린다. 대의제 민주정에서 기존에 선거권이 없던 이들, 다른 말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이들, 만 19세 이하 청소년, 난민,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성소수자처럼 지금껏 누구도 그들을 대표한 적 없었다고 판단되는 이들. 더 나아가 우리의 인식으로는 아직 포착되지 않아 이름조차 없는 무명의 타자들. 대표가 대표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는 대의제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들로부터 주권과 대의제를 벗어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도출된다.
민주주의는 ‘대의 정부’나 ‘다수결의 원칙’, ‘국민주권’ 같은 정지되고 고정된 현실태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역동적인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다. 최장집은 87년의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습에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생각해낸다. 그의 문제의식은 타당하지만, 아직 민주주의를 제도 같은 고정된 어떤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하나의 민주주의는 자신이 예견할 수 없었던 타자의 도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출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의 도래와 함께 종언을 고한다(95p).”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타자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봄으로써, 민주주의는 자신을 새롭게 재정의하고, 모든 기준과 조건, 척도를 뛰어넘어 이들과 연대하는 삶을 구축한다. 다스림을 정당화하는 어떠한 근거도 거부하며, “서로 소통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신체(33p)”를 구축하는 것. 바로 여기에 데모크라티아, 데모스의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