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서리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작은 마을,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학교가는 것 외 특별한 소일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 오면, 주로 동네 아이들과 강가에 멱 감으러 갔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오전 9시, 강물이 데워지지도 않은 시간인데, 벌써 동네아이들은 놀이터에 모여 오늘은 어느 강으로 갈건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행선지가 결정되면, 그 길로 신작로(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까지 걸어간다. 신작로가 시작되는 면 소재지 유일의 버스정류소에 도착하면 각자 고무신을 벗어 든다. 그리고 8월의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진 아스팔트 포장길(신작로) 위를 맨발로 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발바닥이 따듯해서 뛸만하다. 아스팔트 열기가 발바닥에 누적되면서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속도를 내서 더 빨리 뛰는 수 밖에 없다. 한쪽 발바닥이 익기 전에 발빠르게 반대쪽 발로 지면을 박차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뛰다보면 저 멀리서 완행버스가 크락션을 울려대며 달려온다. 죽지 않으려면 도로 옆 흙길로 내려서야 한다. 흙길은 장단점이 있다. 아스팔트 포장길에 비해 좀 덜 뜨겁기는 하지만, 돌멩이가 많아 맨발로는 도저히 뛸 수 없다.
기름냄새와 매연을 한껏 뿜고 버스가 지나가면 다시 아스팔트 위로 올라서 또다시 뛰기 시작한다. 흙길에서 매끈한 아스팔트 위로 복귀하는 그 짧은 순간은 발바닥이 편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달아 오른 아스팔트 열기는 뛰는 속도를 더욱 높여준다. 드디어 강가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온다고 왔지만, 이미 옆 동네 형들이 먼저 와서 강에서 멱을 감고 있다.
8월 한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10시도 안되었기에 강물은 여전히 멱감기에는 차가운 편이었다. 물가에서 발만 담그고 누가 먼저 들어가나 하고 눈치를 본다.
그러다가 심술궂은 친구가 옆에 앉아있는 친구 등을 밀어 물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 그때부터 서로 물속으로 밀어 넣고 하면서 물이 차가운 줄 모르고 물놀이를 시작한다.
한참을 물속에서 놀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다들 집에서 나오면서 식은밥과 풋고추 정도만 먹고와서 그런지 금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한번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뭐라도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진다.
몸만 날렵하면 먹거리는 현지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도 먹을 것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2시간 이상 물속에 있어서 모두들 손바닥이 퉁퉁불어 있다. 그런 손바닥으로 ‘하늘 땅’게임을 해서 역할분담을 한다.
주인이 오면 바로 물속으로 입수하기 위해 팬티만 입은 채 강가에 인접한 수박밭에 몰래 들어간다. 망 보기조, 수박 따기조, 들고 튀기조로 편성된 친구들이 훈련받은 특수부대원처럼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서리해 온 수박은 일단 강물에 넣는다. 한여름 노지에서 열 받은 수박은 차게 해야 더 맛있어 진다. 급하게 따 온다고 깨진 수박이 많았는데, 그런 수박은 시간이 지나면 물속으로 가라 앉아버린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수박은 많지 않았다. 강가 바위에 앉아 시원한 수박을 먹었다. 수박을 먹으면서 ‘수박씨 멀리 뱉기’ 놀이도 덤으로 했다.
어릴적 시골마을의 여름추억은 영화필름처럼 눈에 선하다.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