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브라더(oh, my brother)

개구리 형제

by 맹부


나에게는 형이 한명 있다. 내 형은 우리 형제자매의 기둥이자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든든한 일꾼이다.

특히,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 책임감이 막중해졌다. 우리집은 시골에서는 제법 잘 사는 편이었지만, 7남매 모두 대학 보내기 위해 논팔고, 밭팔고 하느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렇게 재산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형제자매간 재산 상속으로 인한 다툼이나 불화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시간이 갈수록 형제자매의 모임에 빠지는 형제가 없을 정도로 모두 모임에 열성적이다.


부모님께서 자식들 힘들게 살지 말라고 그 어려운 시골생활을 하면서도 자식 모두 대학을 졸업시키고, 재산 다툼을 하지 말라고 재산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나 보다. 부모님 기일에 단 한번도, 단 한명도 돌아가신 부모님 원망하는 형제자매가 없다.


집안의 가장이 된 내 형은 지금 부모님께서 살았던 시골의 그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젊은이가 거의 없는 고향마을에서 이장을 맡아서 동네 살림살이도 챙기고 있다. 집안일과 동네일을 챙기고, 농사도 짓고 있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추석에도 식구들과 고향집을 방문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고향집과 그 고향을 지키고 있는 내 형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해가 갈수록 형 한테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다. 60중반을 향하는 나의 형도 젊디젊은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못된 형들이 괴롭히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쁜 형들을 한손으로 제압해 주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둘이서 ‘곱내’라는 냇가에 멱을 감으러 가곤 했다. 우리가 멱을 감을 장소는 돌아서 걸어 가면 멀고, 강을 가로 지르면 가까웠다.


그럴때면 형은 늘 내게 자신의 넓은 등을 내어 주었다. 당시 내가 수영을 잘하지 못하고 깊은 물을 두려워했기에 형은 나를 등에 업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물살을 헤쳐 나갔다.


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개구리 처럼 형의 목을 껴안은 채 등에 딱 붙어 있었다. 형이 힘겨운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쾌속정을 탄 듯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고시공부 하느라 산으로 절로 다닐 때 형이 많이 챙겨 주었다. 한번은 시골 집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검단’이라는 마을의 깊은 산속에 있는 고시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나의 든든한 지원군인 나의 형은 겨울용 이불보따리를 짐 자전거 뒤에 싣고 오지의 고시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당시는 우리 집안의 꿈과 희망인 내가 고등고시라도 되어 집안을 일으켜 세우길 바라면서 부모님은 물론 온 집안식구들이 나를 밀어 줄때였던 것 같다.



그때 형은 이불 보따리를 싣고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서도 고시합격도 못하고 집안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 채 평범한 일개 회사원이 되어 있는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늘 형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다.


형은 지금도 서울에서 열심히 사는 나를 늘 응원해준다. 나도 늘 잘해야지 하는데, 팍팍한 현실의 삶을 핑계로 보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추석에 찾아뵈니 형님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나도 늙고 있지만 5살 위인 형님은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식구 많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느라 그런지 작지 않은 키인데도 왜소해 보였다. 마음 한편으로 짠한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형님과 단둘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옛날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400km의 거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형이나 나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앞으로 틈틈이 찾아 뵙고, 식사도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후반을 함께 하고 싶다.


그립고 고마운 형님!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럭키세븐 형제자매들이 하루라도 더 보면서 이 힘든 세상을 서로 용기를 주면서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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